최순실 사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르와 K스포츠 재단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최순실이 두 재단의 설립과 인사과정에 깊숙이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까지 나서게 해서 재벌그룹을 대상으로 순식간에 774억원을 모금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최순실 게이트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최순실 사태의 관련자들과 대통령은 사법부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지만 수백억 원을 내놓은 재벌기업들의 문제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국정조사 청문회에 참가한 재벌총수들은 대가성으로 모금에 참여한 것이 아니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정부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의 요청을 기업이 거절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고 답하고 있다. 이런 답변은 과거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답변한 "내라고 하니 내는 게 편안하게 산다는 생각이었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30년 만에 다시 벌어진 정경유착 사태에서 재벌기업들은 여전히 '대통령이 달라고 하니 줄 수밖에 없었다'는 답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재벌들은 대통령이 돈을 달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기에 앞으로도 정경유착사태는 또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비록 이런 사태가 벌어져서 국가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지만 질서 있는 촛불시위와 엄정한 사법적 판결이 있기에 잘 헤쳐 나아가리라고 많은 국민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20~30년 후에도 정경유착 사태가 일어나서 재벌 총수들로부터 같은 답을 들어야 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정말 암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시아지배구조협회(AGCA)가 최근 발표한 '2016년 기업지배구조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기업 지배 구조 생태계'부문은 12개국 중 9위, '기업 실천' 부문은 12개 나라 중 12위로 꼴찌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이 아시아국가 중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강국이지만 지배구조면에서는 아시아 국가들보다 못한 후진국인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를 보는 외국인들의 시각은 한국이 아직도 대통령이 수많은 금융권이나 공기업의 인사에 관여하고 있고, 심지어는 민간기업의 인사나 경영의사결정에 까지도 압력을 가하며, 국민연금도 움직이고 있고, 이사회의 독립성은 전무한 나라인 것이다. 다행히 국제 신용평가 회사인 피치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한국의 국가신용도에 미치는 중대하고도 부정적인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이 사태가 한국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촉발할 수 있을 것으로 진단했다. 그런데 막상 국내에서는 우리 기업들의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과연 제대로 된 지배구조 개선이 일어날지를 기대하기 쉽지 않다.
우리 기업들에게 필요한 지배구조는 이사회의 독립성과 내부통제 제도의 강화이다. 이사회가 독립적이었다면 아무리 대통령의 압력을 받은 재벌 총수가 미르재단에 돈을 기부하려고 했더라도 사재는 몰라도 회사의 돈을 주는 것은 이사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재벌기업들이 외국의 글로벌 기업들과 다른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선진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은 막중한 대통령 권한을 통제하지 못한 대통령제의 실패 때문에 일어났지만 재벌 총수의 권한 또한 아무런 내부통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이사회 독립성의 부재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의 재벌기업들도 글로벌 기업수준의 지배구조를 갖춰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김지홍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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