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에서 태어난 이교도(異敎徒)라고 하고 가나안에서 태어났다고도, 아라비아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그는 거인이었고 원래 이름은 레프로부스였다. 기독교로 개종하여 안티오키아(현재의 안타키아)의 주교 바빌라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전하기로는 리키아 지방에서 선교하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사모스라는 마을에서 순교하였다. 가톨릭 14성인(聖人)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여행자ㆍ산악인ㆍ운동선수ㆍ운전수ㆍ짐꾼의 수호성인이다.
전설에 의하면 레프로부스는 사람들을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네 주는 일로 호구하였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을 섬기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한 왕을 섬겼으나 그 왕은 악마를 두려워했다. 악마를 찾아가니 십자가를 피했다. 그래서 레프로부스는 악마보다 큰 권능을 지닌 누군가가 있음을 알았다. 어느 날 한 은수자(隱修者)가 레프로부스에게 예수의 권능에 대해 설교했다. 감화된 레프로부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라는 은수자의 가르침에 따라 강가에 머물며 가난한 여행자들을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어린이가 그에게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했다. 레프로부스는 어린이를 어깨에 메고 강에 들어갔다. 그런데 강을 건너는 동안 어린이가 점점 무거워졌다. 레프로부스는 '세계 전체를 짊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강 반대편 기슭으로 지팡이를 뻗어 겨우 버텨냈다. 그때 어린이가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수 그리스도이다"라며 자신을 드러냈다. 그 순간 뭍에 닿은 지팡이에서 푸른 잎이 돋고 땅에 뿌리를 내려 종려나무가 되었다.
이 일로 레프로부스는 '크리스토포로스'(Christophoros)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어깨에 지고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그리스도를 어깨에 짊어진다는 신체행위가 아니라 영성적으로 '그리스도를 가슴에 간직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쉬우리라. 그러니 어깨는 가슴, 곧 '심장'과 영혼의 피를 공유한다. 우리는 무거운 책임을 느낄 때 '어깨가 무겁다'고 하고 그 원인이 우리의 피붙이일 때 가슴 한가운데가 벅차고 먹먹해져옴을 감지한다.
저마다 자신만의 우주를 지고 다닌다.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무신론자들은 묻는다. "종말? 내세? 그런 게 어디 있어?" 내세의 유무에 대해, 나도 말 못하겠다. 죽음을 앞둔 시인 구상 선생은 "겨울처럼 닥쳐올 내세가 두렵고 당황스럽다"고 고백하였다. 성녀 테레사 수녀조차 고백하기를 "외로우며 신과 분리돼 있다고 느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 종말이여. 탄생의 그 순간부터 저마다의 종말을 짊어졌음을, 나도 당신도 알고 있느니.
서기 450년 에울라리우스 주교는 칼케도니아(오늘날의 칼케돈)에 성 크리스토포로스를 기념하는 성당을 세웠다. 당신이 유럽을 여행하는 길에 들어간 성당에서 어린아이를 어깨에 짊어진 사나이를 그린 성화를 보았다면 그가 곧 크리스토포로스, 당신이다. 당신의 어깨에 당신의 고단한 하루하루와 당신의 가족과 이웃, 당신의 온 생애와 당신의 우주가 깃들였다. 그러니 당신의 두 어깨는 고귀하다.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