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 얘기쯤 되겠지만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면 끔찍했던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는 새벽부터 0교시 수업을 시작으로 오후 6시에 '일단 하교'를 했다가 저녁 7시반에 '재등교'를 하고 자정까지 '야자'를 하는 일상이 3년내내 계속됐다. 집이 멀거나 타지에서 유학을 온 친구들은 도시락 두 개를 싸가지고 다녔지만 그땐 그럴 수 있는 때였다.
당시 선생님들의 체벌은 그저 사랑의 매였다. 중학교 시절엔 반 친구들 모두가 팬티 바람으로 양손을 깍지 끼고 엎드려 뻗친 채 운동장에 흙먼지를 날리며 한 바퀴를 도는 '단체 기합'을 받기도 했다. 이런 벌을 준 체육선생님은 흡사 전쟁터에서 포로를 규율하는 것 마냥 썬글라스를 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땅바닥에 긁혀 피를 흘리는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가에 옅은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압권은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실력도 뛰어난데다 항상 평안한 미소를 머금고 수업을 진행해 평판이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을 나무랄 때는 돌변했다. 아니 표정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대걸레 몽둥이를 잡고 온 몸의 힘을 팔에 실어 엉덩이를 강타하곤 했는데 힘껏 몽둥이를 내리치면서도 선생님은 끝까지 그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동영상을 찍어 교육청에 신고하네 마네 할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잊고 있었던 그 선생님들의 미소가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오버랩됐다. 박 대통령이 작금의 난국 타개를 위해 국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대통령 하야' 시위를 벌이는 국회의원들 앞을 예의 그 엷은 미소를 띠고 지나간 것인데, 수십년 전의 기억을 소환한 것이다. 그 미소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었겠지만 그것이 평생 훈련된 미소일지라도 뜨아하다는 생각을 넘어 섬뜩함마저 들게 한다.
마침 그 전날에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에서 '황제 조사'를 받으면서 팔짱을 낀 채 옅은 미소를 짓는 장면이 언론 카메라에 잡히기도 하지 않았던가. 약속이라도 한 듯한 두 사람의 미소는 '그래 두드려봐라. 내가 꼼짝이라도 할 줄 아느냐'고 얘기하는 듯하다.
그 미소는 박 대통령의 상황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왜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는 헌법 1조2항을 목놓아 외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표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태연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까. 국정 농단과 농락이라는 몽둥이로 온 국민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두들겨 놓은 체 말이다.
헌법 정신을 스스로 무참히 훼손해 놓고 대통령직에 관해서는 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또 어떤가. 물론 대통령 궐위 상황이 가져올 정치·경제·사회적, 그리고 외교적 파장은 상상 이상일 수 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박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고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남은 임기 내내 분란은 계속 이어질 텐데 정작 본인은 외국정상들을 만나 예의 그 태연한 미소만 짓겠다는 것인지.
지난 주말 서울 도심에는 주최 측 추산 100만명이 모여 촛불을 들고 '퇴진'을 외쳤다. 그땐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란 걸 촛불은 말해준다. 청와대에서 100만 촛불의 함성을 들었다면 '봉건시대'를 살았던 박 대통령은 민주 국민의 함성에 합당한 성의있는 답변을 스스로 내놓아야 한다.
김동선 사회부장 matthew@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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