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뉴욕 김근철 특파원]미국의 제45대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는 지난 8일(현지시간) 대선 투표일 전만 해도 연단에 올라 정적들에 대한 거친 언사와 독설, 앞뒤 따져볼 것 없는 강경한 공약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미국의 현실과 기존 정치에 불만이 가득 찼던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화끈한 연설과 공약에 열광했다.
하지만 대선 승리 이후 트럼프의 목소리는 오히려 낮고 얌전해졌다. 지난 10일 백악관과 의회 방문 당시 그가 보여준 언급과 행동은 이단아라기보단 모범생에 가까웠다. 특히 오랜 앙숙이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서는 "좋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단 말뿐이 아니다. 독불장군식 공약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수위 조절에 나서려는 모습이다. 대선을 치르는 동안엔 극단적인 보수 이념과 사회적 증오의 바탕을 공약으로 유권자를 끌어모았지만 당선 이후에는 기업가 출신답게 현실의 눈높이에 맞춰 실용적인 접근도 양립시키려 한다는 평가다.
트럼프는 지난 11일 월스트리트 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선 보험회사가 환자의 건강상태를 이유로 보험 적용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 등 오바마케어(국민건강보험)의 최소 2개 조항에 대해 "아주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오바마케어에 대한 즉각적이고 완전한 철폐를 공언해 왔다.
자신의 대표적 공약이었던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과 불법 이민자 추방에 대해서도 타협을 고민하는 흔적이 보인다.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등 최측근들은 최근 언론을 통해 "약속대로 멕시코 장벽은 건설된다. 그러나 의회에서 예산도 확보해야 하고, 국경 전체에 장벽을 쌓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며 수위를 낮추고 있다. 공화당 원내 1인자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트럼프와 면담 이후 불법 이민자 색출과 추방을 전담할 '불법이민자 추방군' 공약이 폐기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 1100만명 즉각 추방' 공약에 대해서도 최근 인터뷰를 통해 "일단 200만~300만명을 먼저 추방할 것"이라며 수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강경 일변도였던 국제 관련 정책도 변화 기류가 감지된다. 트럼프는 13일 트위터에서 "뉴욕타임스(NYT)는 내가 '더 많은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얼마나 부정직한 이들인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3월 CNN에 출연해 "북한도 파키스탄도 중국도 이미 핵무기를 갖고 있으며 이란도 10년 이내에 핵무기를 가질 것"이라면서 "일정 시점에서 일본과 한국이 북한의 '미치광이'에 맞서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다면 미국의 형편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트럼프는 지난 9일 새벽 대선 승리 연설에서도 "모든 사람과 나라를 공평하게 대하겠다"고 다짐했다. 미국 우선주의가 먼저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향후 국제 안보와 무역 정책 논의에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탈출구를 마련해 둔 셈이다.
트럼프의 실용주의적 변신 시도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나쁘지 않다. 트럼프 당선 확정 다음 날부터 폭락이 예상됐던 증시는 오히려 상승세를 탔다. 하지만 트럼프의 공약과 현실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다. 지지자들의 반발에 직면할 위험도 있다. 현재 시점에서는 여론도 시장도 주변국도 '트럼프의 변신'을 '일단 더 지켜보자'는 기류다.
뉴욕 김근철 특파원 kckim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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