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헌민공(憲敏公) 윤탁연은 임진왜란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왜란 당시 함경도 순찰사로 임명돼 임해군과 순화군을 호위해 함경도로 들어가 왜군과 맞서싸운 공신이다. 그는 현대보다 당대에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선조 임금의 즉위에 막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명문가였던 칠원 윤씨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난 윤탁연은 1565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임관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해에는 승정원 주서로 근무하며 주요 기록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운명을 바꿔줄 중요한 사건과 만나게 된다.
그의 관료인생을 뒤바꿔준 것은 숫자 '3'과의 기막힌 인연으로 알려져있다. 당시 명종은 중병이 들어 후사를 결정해야되는 상황이었고, 영의정인 이준경은 유조를 받들고자 기록관으로 윤탁연을 불렀다. 여기서 명종의 후사가 덕흥군의 셋째아들이었던 하성군으로 결정되는데 이가 바로 선조임금이다.
이때 윤탁연은 덕흥군의 '삼자(三子)'라는 말에 들어갈 숫자 3을 일반적으로 쓰는 '三'이라 쓰지 않고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어음에 사용하던 '參'으로 적었다고 한다. 이런 그의 재치 덕분에 명종 사후 선조임금은 별다른 논쟁없이 임금에 올라설 수 있게 됐으며 윤탁연은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운 셈이 됐다. 이후 선조임금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선조가 임금이 된 이후 바로 승진이 시작돼 젊은 나이에 주요 요직이었던 예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에 자주 임명됐다. 1574년에는 명나라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족보를 잘못 기재한 문제를 수정하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의 수정을 위해 주청사 일행으로 다녀왔다. 이 일이 잘 마무리되면서 광국공신(光國功臣)에도 책봉됐다.
승승장구하며 잘 마무리되는 듯 했던 관료생활은 70이 넘어 만난 임진왜란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1592년 선조임금은 한양에서 피난을 가면서 윤탁연을 순찰사로 임명하고 임해군과 순화군을 호종해 함경도로 가서 의병 및 관군을 규합해 왜군과 맞서 싸울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함경도에서는 임화군과 순화군의 횡포에 분개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오히려 왕자들을 붙잡아 일본군에 넘기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다. 전시였던 상황과 왕자들의 잘못은 있었어도 큰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악재를 만났으나 다행히 순찰사로서 계속 활동할 것을 명받는다. 선조의 각별한 총애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70이 넘은 노장으로서 북방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것이 병이 되어 2년 뒤인 1594년, 77세의 나이로 군중에서 병사한다. 함경도 의병장인 정문부와의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사실로 판명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매우 성실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송익필, 이산해 등과 함께 당대 8대 문장가 중의 한사람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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