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영주 기자]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첫날부터 공직사회에 '눈치보기'와 '대외기피증'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간단한 식사 대접도 괜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어 법 시행 초기에는 아예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완연하자 황교안 국무총리까지 적극적인 직무수행을 독려하고 나섰다.
28일 0시를 기해 김영란법이 시행되자, 공무원들은 외부인과의 교류를 사실상 전면 중단했다. 이날 이후 잡힌 외부약속을 대부분 취소했고, 새로운 약속도 잡지 않고 있다. 김영란법이 국민적 관심을 받고 있는 만큼 소위 '시범케이스'로 걸리면 옷을 벗어야 할 것이라는 경계심이 팽배하다.
김영란법 시행을 바라보는 공무원들의 시각은 복잡미묘하다. 우선, 당장 누구와 만날 때 밥을 얻어먹어도 되는지, 본인이 밥값을 내도 되는지를 따지게 된다. 애매할 때에는 각자 자기 밥값을 계산하는 더치페이를 하라고 하지만 하루 아침에 오랜 관행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특히 업무협조를 위해 다른 부처 공무원을 만나거나 정책홍보를 위해 기자들과 식사를 할 때에 더치페이를 하자는 말을 꺼내기 어렵다. 앞으로는 "이번에 우리 부처 예산 좀 잘 부탁한다"든지 "이 정책 만드느라 고생했는데 신문에 크게 써달라"든지 하는 상투적인 부탁도 할 수 없다. 법 테두리 내에서 가벼운 식사대접을 하고, 정책 설명을 하는데 그쳐야 한다. 설명과정에서 습관적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면 법 위반이다.
상대방이 그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다면 언제든 신고를 할 수 있다는 의심을 던져버리기도 어렵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예산실 직원을 만나 신규 사업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도, 정책홍보를 위해 기자를 만나는 것도 망설여질 수 밖에 없다.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고위공무원 A씨는 "각 부처 공무원들이 예산 확보를 위해 기재부 예산실 직원과 간단한 점심을 먹는 것도 이것저것 따지게 됐다"며 "50대 실·국장이 20대 젊은 기자에게 더치페이하자고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이냐"고 되물었다. 결국, A씨는 28일 이후 약속을 모두 취소했고, 새로운 약속도 잡지 않고 있다.
그동안 공기업이나 민간기업 관계자들로부터 접대를 받아온 공무원들은 이들과의 약속을 대부분 취소한 상태다. 이런 만남은 많은 경우 직무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식사나 향응을 받아서는 안된다. 더치페이를 해야 하는데, 이 역시 부탁을 하거나 얼굴을 익히러온 상대방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B국장은 "술이나 식사는 물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무조건 더치페이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이라며 "공무원 봉급으로 일부러 내 돈 써가며 업계나 민원인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쫓아다닐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B국장은 "그동안 업무협의차 가끔 만나온 사이라도 지금은 '나중에 보자'는 말만 주고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공직사회가 대외기피증에 빠지면서 소극행정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C장관은 "김영란법이 많은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공직사회는 단기적인 충격은 물론 업무행태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뀔 수 있다"며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국정과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는데 보신주의에 빠져들지 않을까 매우 걱정된다"고 전했다. 특히, 중앙부처의 세종시 이전 이후 업무생산성과 효율성이 급격히 떨어졌고, 민간과의 접촉마저 끊기면서 생긴 '갈라파고스'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급기야 황 총리는 27일 국무회의에서 소극행정에 대한 경계령을 내렸다. 황 총리는 국무위원들에게 "공직자들이 오해소지를 차단한다는 생각으로 대민 접촉을 회피하는 등 소극적 자세로 업무에 임하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직무수행을 독려해 달라"고 주문했다.
세종=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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