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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경운기는 어떻게 우는가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13초

그 집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었다./할아버지, 점심 때 집에 왔으나 할머니가 아직 오지 않아/대강 챙겨 자시고 다시 부지런히/경운기 몰고 밭으로 나갔다.//할머니, 아랫마을 갔다가 부랴부랴 집에 와 보니 에고, 이 양반/맹물에 밥 말아 그냥/밥 떠 넣고 장 떠 넣고 한 눈치. 할머니 못내 속이 상해서/쯧, 쯧, 평소처럼 일 거들 요량으로 한참 걸어 밭으로 나갔다.//할머니, 와락 달려들어 영감! 영감님을 얼싸안아 일으켰으나/119 구급차가 도착했을 땐 이미/숨을 거두어 묻은 흙 묻은 손.//"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 기분이 좋구만."/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이 말/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장면, 별사가 따로 있다.//무쇠팔 경운기 모는 소리도/먼 길 소실점처럼 이랴, 이랴…… 멀어져간다.


 이렇게 이야기 잘 하시는 어른을 보았나. 저 칼같은 기승전결이 어김없이 사람을 사로잡는다. 문인수의 '경운기 소리'라는 시다. 경운기 몰고 나가 일하시다가 점심 먹으러 들어왔는데 외출한 할머니가 아직 귀가하지 않아 혼자 밥을 차려먹은 할아버지. '기'는 참 평범한 일상이다. 무슨 얘길 하려 저러시나 하는 기분으로 만나는 도입부다.

 '승'은 '기' 상황을 몰고 간다. 로미오 줄리엣처럼 이번엔 할머니가 돌아와서 보니, 영감님이 혼자 점심 드시고 다시 일하러 나가셨다. 아이고. 미안하고 안타까워 서둘러 할아버지 계신 밭으로 일 거들러 나간다. 둘이 사는 촌로부부지만 그래도 정겹고 아름답다. TV '여섯시 내 고향'쯤에서 보이는 얼굴들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까지였다면 리포터의 수다 몇 줄 듣고 돌아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 반전이다. 예고도 하지 않고 바로 급진전되는 바람에 더욱 놀랍다. 할머니가 바로 쓰러진 할아버지를 얼싸안아 일으키는 장면이다. 구급차가 왔을 땐 숨을 거뒀다. 이 '전'의 상황이 되면, 아까 점심 못 차려준 일이 얼마나 애통해졌는지 느껴진다. 혹여 그것이 저승길을 재촉했는지 할머니의 자책 또한 글자 밑에서 한스럽게 뚝뚝 떨어져 나온다.

 '결'은 또 하나의 반전으로 아리는 마음을 더욱 키운다. 아침에 노부부가 나눈 대화이다.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린다고 할머니가 말해줬더니 "그래, 기분이 좋구만." 했던 그 말. 이제 경운기만 바라보면 그 말이 생각나고, 영감님이 눈물로 터져나올 판이 됐다. 그놈의 경운기가 영감님을 보내려고 그토록 시동이 잘 걸렸던가. 그 '소리'가 새삼 원망스럽다. 아니, 영감님이 세상 하직할 걸 부지불식간에 예감하면서 나더러 안심하라고 "그래, 기분이 좋구먼" 했던가. 그 소리 좋던 경운기를 소처럼 이랴 이랴 몰고 밭고랑 누비느라 저승 흙 파는 것인 줄도 몰랐던가. 할머니 통곡 속에서 경운기 소리 듣는 옆사람도 눈물 훔칠 지경이다.


 문인수 시인은 아마도 시골의 어느 상가에 가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고, 저 할머니의 곡소리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읽었을 것이다.


상복을 입고 "그래, 기분이 좋구먼"의 할아버지 마지막 말씀을 되뇌며 눈물 쏟아내는 어수선한 별사를 시의 행간 속으로 쟁여넣었을 것이다. 사는 일, 혹은 그 뒤의 일. 이 일 말고 또 뭐가 있는가. 서울서는 들을 수도 없는 경운기 소리가, 한번에 드르륵 시동 걸린 그 소리가 귀에 자꾸 들린다.


빈섬(이상국 디지털뉴스룸 부국장)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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