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초동여담] 미스터 메모리

시계아이콘02분 09초 소요

카메라, 녹음기, 복사기, 컴퓨터, 외장메모리...이제 지천일 만큼 흔해서 감명도 사라졌지만 그 기술 하나하나는 인간의 삶을 바꿔놓은 기적들이라 할 만하다. 이런 것들이 없었을 때 인간은 머리로 기억하고 글자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지 않는 한, 흘러가는 시간에 놓인 것들을 제대로 붙잡을 수 없었다. 기억과 문자와 그림은 재현(再現)이라는 측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그 용량(容量) 면에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기억할 것이며 몇 글자나 남겨놓을 것이며 무엇을 그려놓을 것인가. 특히 소리는 부실한 구비전승(口碑傳承)과 재치있는 언어표현에 의존할 뿐이었다.


1935년에 나온 알프레드 히치콕의 <39계단>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억장치 중에서 초창기 장치들이 등장하면서 감명을 받기 시작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첩보영화다. 그 시절 스파이짓은 문서 도둑질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은 카메라로 서류를 찍거나 대화를 녹취하는 첨단 스파이 행위가 발각되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영화는 1차세계대전 직전에 해군의 중대 기밀을 빼내는 스파이를 다뤘다. <39계단>은 그 스파이 집단의 비밀명이다. 세계대전을 발발하게 할 만큼 중요한 비밀을 이 사람들은 어떻게 빼냈을까.방대한 양의 문서를 훔치거나 그것을 카메라로 찍어서 넘기는 게 정상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히치콕은 기막힌 반전(反轉)을, 정상적인 방법의 뒤통수를 치는 방식으로 숨겨놓는다. 당시 그 도시에는 <미스터 메모리>라는 유명한 스타가 있었다. 그는 워낙 기억력이 좋아서 뭐든지 한번 보면 좔좔 왼다. 그 비범한 재능을 이용해 무대에서 기억쇼를 벌여 인기를 끌고 있었다. <39계단>은 그를 몰래 데려와 군사문서를 보여준 뒤 그와 함께 국경을 넘는다.

히치콕의 이 영화는 원작이 있었다. 1915년 존 버칸이라는 사람이 쓴 소설이다. 버칸은 군인이며 정치가였고 소설도 썼다. 영화가 나올 때 버칸은 영국 육군 정보부의 대령이었다 한다. 내가 흥미로워하는 건, 미스터 메모리가 실재(實在)하는 인물이었느냐는 점이다. 버칸은 그의 상상력으로 이런 인물을 창조해냈을까. 아니면 당시 정말 이런 사람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러시아의 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1902-1977)는 이 세상에 존재했던 미스터 메모리를 증언한다. 그의 이름은 솔로몬 V 셰르셉스키(1886-1958)다. 셰르셉스키는 신문기자였다 한다. 인터뷰 자리에서 남들은 열심히 받아적고 있을 때 그는 그저 말하는 사람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그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하게 말을 기억해냈다. 이 사람은 훗날 전유럽에 알려져 인류 최고의 기억술사(mnemonist)로 불리게 된다.


셰르셉스키는 루리야 박사의 연구실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30개의 단어를 들려주자 그는 즉시 그대로 외웠고 70개의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숫자를 수십 개 불러줘도 마찬가지였고 <나가사다마다마사나가다라바자사다아사차라자...> 같은 무의미한 음절로 된 무한히 긴 열을 읽어줘도 그대로 말했다. 문자 그대로 미스터 메모리였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였다. 기억의 용량도 끝이 없었지만, 한번 기억한 것을 잊는 법도 없었다. 16년 전 3월7일 오후2시에 내가 말해줬던 말 중에서 스물 여덟 번째 단어는 무엇이었느냐라고 물어도 척척 대답이 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섣불리 짐작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이나 체계와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아마도 카메라나 녹음기가 저장하는 방식처럼, 특징들을 기호화하여, 촬영하듯 단순히 담는 방식의 기억 능력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문자를 축적하고 의미를 연관하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우리의 방식과는 달리, 카메라처럼 들은 것을 기억의 필름에 인화해놓는 그런 능력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남자가 그 남자였을까. <39계단>에 나왔던 기억쇼의 미스터 메모리가 셰르셉스키를 모델로 한 것일까. 존 버칸이 소설을 발표할 때인 1915년이면 셰르셉스키가 29세 때이다. 아마도 그가 암기의 재능으로 유럽에서 슬슬 유명해지기 시작할 때였을 수도 있다. 만약에 그가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면, 이 첩보 스토리는 시시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일부는 알고 일부는 모르는 상태였을 때에 그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면, 소설화하기에 꽤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39계단>이 발표된 때인 1935년에는 셰르셉스키가 49세 때이니, 미스터 메모리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릴 무렵이었을 것이다. 물론 셰르셉스키와 미스터 메모리는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인간의 기억 능력이 신화를 이루던 시절과, 기계가 그 신화를 대행하기 시작하던 시절이 맞물린 접점에서, 이런 영화와 이런 사람이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요즘 디지털뉴스룸에 앉아 때로 가만히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카메라 붙은 휴대폰을 쥔 셰르셉스키가 되지 않았는가. 이 영상기억의 기적으로 우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많은 기억으로 행복해지기는 했는가.






빈섬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6.01.2009:48
    저렴해서 미국인도 푹 빠졌다…"오늘은 라면에 김치" 외신도 감탄한 K푸드⑤
    저렴해서 미국인도 푹 빠졌다…"오늘은 라면에 김치" 외신도 감탄한 K푸드⑤

    "전 세계에서 K푸드에 대한 수요가 식을 줄 모른다." 미국의 경제 뉴스 채널 CNBC는 지난 18일(현지시간) 한국 식품의 글로벌 확산세에 대해 이같이 조명했다. 이 방송은 특히 라면을 K푸드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 품목으로 지목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K팝과 한국 드라마에서 라면이 자주 노출되면서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까지 수요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물가 인상과 생활비 상승도 비교

  • 26.01.2007:16
    "힙하다 힙해" 퇴근길 치맥에 한국 화장품 싹쓸이까지…일상에 스며든 'K'④
    "힙하다 힙해" 퇴근길 치맥에 한국 화장품 싹쓸이까지…일상에 스며든 'K'④

    지난 15일(현지시간) 오후 7시 미국 뉴욕 맨해튼 32번가 K타운. 한국 치킨 브랜드 BBQ 매장은 '치맥'을 즐기려는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지하 1층에 마련된 테이블은 일찌감치 만석이었고 20~30대 직장인과 대학생들은 치킨을 앞에 두고 맥주잔을 부딪치며 저녁 시간을 즐겼다. 치킨뿐 아니라 떡볶이와 김치볶음밥 등 다양한 한국 메뉴를 함께 주문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 매장을 자주 찾는다는 대학생 메디슨 씨는 "학교 근처

  • 26.01.1915:08
    "돼지갈비에 나물" 파리지앵의 저녁 식탁 오른다
    "돼지갈비에 나물" 파리지앵의 저녁 식탁 오른다

    K웨이브 글로벌 현장 점검 "형 집에 놀러 가는데 저녁 메뉴인 돼지갈비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지난해 연말 프랑스 파리 오페라 지역(Rue Sainte-Anne)에 위치한 유명 한인 슈퍼마켓 'K마트'에서 만난 맥심 카본(27살)씨는 '100% 태양초'라고 적힌 고춧가루와 송이버섯과 무, 고추장, 튀김가루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카본은 한국 신림동에서 1년 거주하면서 처음 접한 한식을 잊지 못해 귀국 후에도 파리 한식

  • 26.01.1914:08
    ③"대중문화는 화려한 분수…'일상문화' 흘러야 30년 간다"[인터뷰]
    ③"대중문화는 화려한 분수…'일상문화' 흘러야 30년 간다"[인터뷰]

    "대중문화는 '화려한 분수'처럼 금방 꺼질 수 있습니다. 지하수처럼 '일상 문화'가 계속 흐르도록 해야 K 브랜드와 산업의 생명력을 30년 이상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일열 전 파리문화원장은 최근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K브랜드의 글로벌 지속가능성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K콘텐츠는 강력한 진입로가 될 수 있지만, 휘발성이 크다"며 "어느 순간 거품이 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썸

  • 26.01.1914:08
    돼지갈비 요리하는 파리지앵…자기 전엔 韓스킨케어 톡톡[K웨이브3.0]②
    돼지갈비 요리하는 파리지앵…자기 전엔 韓스킨케어 톡톡[K웨이브3.0]②

    "형 집에 놀러 가는데 저녁 메뉴인 돼지갈비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지난해 연말 프랑스 파리 오페라 지역(Rue Sainte-Anne)에 위치한 유명 한인 슈퍼마켓 'K마트'에서 만난 맥심 카본(27살)씨는 '100% 태양초'라고 적힌 고춧가루와 송이버섯과 무, 고추장, 튀김가루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카본은 한국 신림동에서 1년 거주하면서 처음 접한 한식을 잊지 못해 귀국 후에도 파리 한식당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현지 한식당 대부분이 중

  • 26.01.1609:11
    윤희석 "한동훈 제명돼도 당 위한 활동 계속"
    윤희석 "한동훈 제명돼도 당 위한 활동 계속"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월 15일)※ 기사 내용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소종섭의 시사쇼'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종섭 : 전화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희석 : 감사합니다. 소종섭 :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제명 처분을 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나요? 윤희석 :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죠

  • 26.01.1416:21
    이준석 "한동훈, 고수라면 창당이나 서울시장 무소속 출마 선언할 것"
    이준석 "한동훈, 고수라면 창당이나 서울시장 무소속 출마 선언할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마예나 PD■ 출연 :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1월 14일) ※ 기사 내용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소종섭의 시사쇼'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종섭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소종섭의 시사쇼 시작하겠습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와 함께 여러 가지 이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지내셨죠? 이준석 : 예, 그렇습니다. 소종

  • 26.01.1008:01
    "아내는 연상…원더우먼 같았다" 유산·가난 속에서 함께 버틴 박홍근 의원 '인생 최고의 반석' [배우자 열전]②
    "아내는 연상…원더우먼 같았다" 유산·가난 속에서 함께 버틴 박홍근 의원 '인생 최고의 반석' [배우자 열전]②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편집자주6·3 지방선거의 해가 열렸다. 여야 후보자들의 출마가 이어지고 있다. 후보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정책을 내세우는지와 함께 배우자는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소종섭의 시사쇼'는 출마(또는 출마 예상) 후보자 배우자에 대해 알아보는 '배우자 열전'을 시작한다. ①문혜정(정원오

  • 26.01.0808:49
    동갑내기 캠퍼스 커플…"예뻐보이더라" 정원오, 배우자 문혜정 첫 인상[배우자 열전]①
    동갑내기 캠퍼스 커플…"예뻐보이더라" 정원오, 배우자 문혜정 첫 인상[배우자 열전]①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마예나 PD편집자주6·3 지방선거의 해가 열렸다. 여야 후보자들의 출마가 이어지고 있다. 후보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정책을 내세우는지와 함께 배우자는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소종섭의 시사쇼'는 출마(또는 출마 예상) 후보자 배우자에 대해 알아보는 '배우자 열전'을 시작한다. ①문혜정(정원오

  • 26.01.0710:25
    장성철 "장동혁, 한동훈 제명 아니면 탈당 권고할 듯"
    장성철 "장동혁, 한동훈 제명 아니면 탈당 권고할 듯"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1월 5일) 소종섭 : 어서 오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장성철 :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소종섭 : 이 얘기부터 해보죠.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와 관련해서 폭언했다, 보좌진에게 갑질했다, 남편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등 의혹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