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서 귀국 주도한 김장한役 열연한 배우 박해일
"한 여자를 지킨 김장한, 호안 미로 특별전에서 느낀 순수한 감정 떠올리게 하는 인물"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영화 '덕혜옹주'에서 김장한은 가상의 인물이다. 덕혜옹주와 어린 시절 혼담이 오간 김장한과 덕혜옹주의 귀국을 주도한 그의 형 김을한의 면면에 허구를 더했다. 이를 연기한 배우 박해일(39) 씨는 "(배우가) 스스로 채울 여지가 많아 끌렸다"고 했다. 그는 김장한의 노년까지 연기한다. 살쩍이 희끗희끗해 가는 노인은 '은교(2012년)'에서 경험한 터라 익숙하다. 문제는 장애 설정. 김장한은 덕혜옹주를 구하다가 총상을 입어 걸을 때 다리를 전다. 잘못하면 감정 연기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그는 "독이 되기 쉬운 설정이다. 관객이 너무 주시하지 않길 바랐다"고 했다.
제대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신발의 굽을 다르게 하고, 한 쪽 다리에 힘을 잔뜩 줬지만 움직임이 장작처럼 뻣뻣했다. 골반이 틀어져 온몸이 시큰시큰했다. 하지만 그는 곧 해답을 찾았다. "잠시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어떤 아저씨가 다리를 절면서 화장실에 들어가더라.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걸음이 자연스러웠다. '저렇게 평생을 사셨을 텐데'라고 생각하니까 힘들어 보이면 이상하겠더라. 장애가 있지만 자연스럽게 걷는 걸음에 주안점을 뒀다."
박해일 씨는 평소에도 주위를 잘 살핀다. "배우는 일상을 표현하는 직업이다. 영화 속 어떤 인물도 본질은 일상에 출발한다"고 했다. 그는 다양한 사람과 대화를 즐긴다. 최근에는 임순례 감독(56)의 소개로 종사르 잠양 켄체(55)를 만났다. 부탄에서 티베트불교의 영적 스승으로 추앙받는 승려로, 영화 '컵(1999년)'ㆍ'나그네와 마술사(2002년)' 등을 연출했다. 카메라를 불교의 진리를 전하는 또 하나의 언어로 활용한다. 그는 배우를 '연기로 관객에게 동기를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박씨는 "켄체의 말대로라면 나부터 배역을 잘 파악해야 한다. 배우로서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촬영을 하면서도 많은 지혜를 얻는다. 특히 임 감독의 '제보자(2014년)'에서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의 실체를 파헤치는 윤민철 PD를 연기한 뒤로 어떤 뉴스를 접해도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사건을 차분하게 바라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한다. 박씨는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역사왜곡 우려가 있었던 덕혜옹주에 출연한 이유는 무엇일까.
박해일씨는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의 보편적 정서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관객을 그 시대로 인도하는 힘은 개인의 이야기에서 나온다. 이야기의 진정성에 집중하는 허진호 감독(53)을 보며 우려를 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박씨는 오디오 가이드 녹음으로 참여한 '꿈을 그린 화가, 호안 미로 특별전'을 떠올렸다. "아기자기하게 조합된 다양한 색채에서 미로의 솔직하고 순수한 감정이 묻어난다. 김장한을 비슷하게 봐주셨으면 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한 여자를 끝까지 지켜낸 남자 말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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