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사건 이후 남성들의 역공은 여성에 대한 공감력 부족탓 주장…말미에 '나는 남자" 밝히기도
[아시아경제 권성회 수습기자]“결국 여혐 못지않게 나쁜 남혐 아니냐고요? 부디, 여성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하는 얘기를 잘 들어주세요.”
23일 새벽, IT 전문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 한 회원이 탈퇴를 예고하는 글을 올렸다. ‘탈퇴를 결심하며: 저는 당신의 불편함이 불편합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26일 오전 6시30분 기준 조회수 만 오천 이상을 기록했고 댓글도 300개가 넘게 달렸다.
글쓴이는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회원들 대다수의 반응,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단체에 대한 경멸, 사건의 본질에 대한 매도가 이 모두의 공원(게시판 이름)에 넘치는 현재 클리앙의 상황에 대해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며 탈퇴 예고글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23살 여성이 정신병력이 있는 용의자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정신병 환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정부당국과 제도가 빚은 참사입니다. 네, 화장실이 좀 더 안전하게 관리되었더라면 막을 수 있는 비극이었습니다”고 우선 ‘강남 살인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 말했다. 또한 “조현증 환자의 여성혐오와 일베(일간 베스트) 중심의 온라인 여성혐오, 그리고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남녀차별은 다른 문제입니다”며 사건 이후 벌어진 ‘여성 혐오 논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클리앙 등 다수 커뮤니티에서 제기되고 있는 ‘여성들의 추모가 변질됐다’는 의견을 반박했다. “추모가 변질되었다고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니던가요)”라며 “단순히 한 여성이 죽어서 이렇게 들고 일어난 게 아닙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들은 당신들, 남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아가며 겪는 불평등과 차별, 질서, 폭력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며 “핵심은 여성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당해왔지만 차마 공유하지 못했던, 여성의 여성으로서의 경험입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번 사건을 세월호 참사와 비교하며 ‘공감’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세월호 사건을 집단적으로 경험하고 공감했던 우리가, 이런 상황을 접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절망스럽습니다. 세월호 사건에 많은 사람들이 같이 슬퍼하고 분노했던 이유는, 그 시간에 세월호 안에 있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과 그 밖에 있던, 살아남은 우리들 사이의 간극이 매우 좁았음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입니다”고 공감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글 뒷부분에서야 자신이 남성임을 밝혔다. “저는 남자로서 당신들이, 그리고 제가, 여성들이 털어놓는 얘기에 완전히 공감하고 같이 ‘여혐 극혐’을 외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며 “남성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은, 잘 듣는 것입니다. (중략) 공감하려 노력하는 데서 시작했으면 합니다”고 글을 끝맺었다.
해당 글은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스스로를 약자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클리앙에 이렇게 많다는 게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처럼 본문에 공감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반면 글쓴이의 의견에 반하는 댓글도 이어졌다. 한 회원은 “이번 사건은 불행한 사고에 가깝고, 여성으로서의 불편함은 이번 건과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원은 “현재 강남역에서의 몇몇 집단들의 행동은 그 올바른 메시지마저 왜곡시키고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며 ‘추모가 변질됐다’는 의견을 옹호하고 나섰다.
실제로 클리앙처럼 여성회원보다 남성회원이 많은 이른바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강남 살인사건 이후 ‘반페미니즘’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 클리앙에서는 같은 날 오후 서초경찰서 앞에서 시민들이 ‘여성혐오가 죽였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사진에 대해 ‘점입가경’ ‘심각하다’ ‘미쳤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역시 남초 커뮤니티로 분류되는 야구 전문 커뮤니티 ‘엠엘비파크(MLB PARK)’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강남역에서 추모를 위해 모인 여성들에 대해 ‘그냥 화난 사람들만 그쪽에 모인 거예요’라는 반응 등이 주를 이뤘다. 역사학자 전우용이 트위터에 게시한 ‘여혐 범죄 피해자를 추도하며 “나도 잠재적 가해자”라고 반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성숙한 사람의 성찰적 태도입니다’라는 글에 대해서는 ‘불펜(게시판 이름) 인기스타인 전우용 역사학자 무리수’라는 게시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형성돼 있는 성차별에 대해 반성하자는 글도 눈에 띈다. 클리앙에 올라온 ‘여성혐오 혹은 성차별의 실체를 본 적이 없다?’의 글쓴이는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논란에서 클리앙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라며 “전체적으로 (여성혐오가) 방조된 것도 사실이죠”라고 털어놓았다.
엠엘비파크에도 “물론 저도 여혐을 방조했습니다”며 “지금 강남역 사건을 보면 제발 여혐 살인사건이 아니어야만 하는 생각이 팽배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남자로서 약점을 잡히기 싫어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는 글이 올라왔다.
여성 혐오가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표출된 것은 극우 성향의 ‘일베’가 탄생하면서부터다. 일베는 여성을 포함해 사회적 약자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글이 많아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메갈리아 등 여성 커뮤니티들이 지난해부터 시작한 ‘미러링’에 대한 반감은 일베뿐 아니라 다른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여혐’ 게시물이 증가하는 원인이 됐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엠엘비파크 게시물에는 메갈리아의 극단적인 남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음에도 ‘이젠 메갈리안 옹호하는 사람까지 나오네’ ‘메갈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여성 우월을 주장해 왔다’는 반박댓글이 달렸다.
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은 19일 페이스북에 “정신병 증상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며 “그(강남 살인사건 피의자)가 자신의 소외감의 원인을 여성들의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찾고, 분노의 초점을 여성들에게 맞춘 것은 분명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의 망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망상은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다”고도 얘기했다. 이어 “만약 우리 사회가 여성이 남성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안전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누군가 이런 살인을 저지르고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며 남성보다 여성이 더 불안전함을 느끼는 사회를 지적하기도 했다.
‘탈퇴 예고글’을 올린 클리앙 회원은 결국 해당 사이트를 탈퇴했다. “이 글은 6시간 뒤에 탈퇴하면서 함께 삭제하겠습니다”고 썼으나 “이 글은 남겨두겠습니다”는 댓글을 남긴 채 탈퇴하겠다는 약속만 지켰다. 글쓴이는 “분명한 사실은 사람이 죽었고, 그 분이 아니더라도 많은 여성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폭력과 차별, 질시와 혐오가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입니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커뮤니티를 비롯한 다수의 인기 커뮤니티들은 20~30대가 주류를 이뤄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으로 평가받는다.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등 정치 성향도 진보에 가깝고, 동성애 등 사회적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기성세대와는 다른 전향적인 태도를 지닌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을 대립시키는 ‘성 문제’에서만큼은 다르다. 커뮤니티의 주를 이루는 남성 회원들은 여성들이 ‘여자여서 겪는 일상적인 문제’를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띈다. ‘탈퇴 예고글’을 올린 클리앙 회원도 이 같은 문제에 대해 회의감을 가졌다. 여혐·남혐을 둘러싼 논쟁이 금방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은 이유다.
권성회 수습기자 street@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