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등과 이야기·구조·캐릭터 판박이…여성 타깃으로 철저하게 기획
대중 입맛 확인된 이야기들 한데 잘 버무려…동아시아 흥행 비결 눈여겨 볼만 해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대만영화 '나의 소녀시대'는 낯익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닮았다. 이야기, 구조, 캐릭터까지 판박이다. 배경도 다르지 않다. 1994년, 대만의 어느 고등학교. 여학생들은 성적표보다 '행운의 편지'를 받고 당황한다. 학생주임의 한 마디에 벌벌 떨면서도 인기스타 사진을 수집하는데 열을 올린다. 좋아하는 이성은 따로 있는데,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한다.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면 롤러스케이트쯤은 필수다.
나의 소녀시대는 이런 추억 어린 풋풋한 로맨스를 다양한 에피소드로 전한다. 이미 일본 만화 '슬램덩크(1990년)', 일본 TBS 드라마 '꽃보다 남자(2005년)', 영화 '늑대의 유혹(2004년)' 등에서 소개한 진부한 내용들이다. 공부와 담을 쌓은 쉬타이위(왕대륙)는 린전신(송운화)의 도움으로 모범생이 된다. 둘은 학생주임의 부당한 처사에 다른 학생들과 힘을 합쳐 맞선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사랑을 느끼지만 서로의 마음을 오해해 다른 이성을 만난다.
프랭키 첸 감독(42)은 각 에피소드들을 '응답하라' 시리즈의 '신랑 찾기' 구조와 비슷하게 나열한다. 그런데 식상하지 않다. 위험이 도사리는 구간마다 추억을 소환하는 장치들을 넣었다. 롤러스케이트장, 비디오방, 농구화 에어조던2, 배우 유덕화(55) 등이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러운 연출도 제법 활용해 주위를 환기시킨다. 각각의 사건을 연결하는 이음새에 의미도 부여해 후반 반전에 힘을 싣는다. 대중의 입맛이 확인된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잘 버무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첸 감독은 이런 차용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타깃까지 확실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30대 후반이 된 린전신의 직장생활로 시작한다. 상사와 후배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모습을 조명해 처음부터 또래 관객과 린전신 사이 공감대를 유도한다. 린전신이 무료함과 고독을 달래려고 떠올리는 과거는 판타지로 물들어있다. 그것은 다시 마주한 현실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다른 얼굴의 배우가 똑같이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이것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메시지로 요약돼 특히 여성 관객에게 쾌감을 준다.
효과적인 전달에는 한 가지 전제가 따른다. 주인공과 관객의 공통점이 많아야 한다. 첸 감독은 과거의 린전신을 미소녀로 설정하지 않았다. 작고 마른 송운화의 얼굴에 잠자리 안경을 씌우고 머리를 부스스하게 헝클었다. 린전신의 마음에 사랑이 피어나면서 외모는 변한다. 친오빠의 여자친구로부터 손질을 받고 새로운 모습으로 학교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관객에게 '당신도 바뀔 수 있다'는 광고 문구처럼 다가간다. 린전신이 흠모하는 오우양(이옥새)과 쉬타이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타오민민(간정예)을 절세미녀로 설정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의도의 일부이다. 질투심을 유발하는 상대에 범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둬 극장에서 린전신을 응원하게 하고, 밖에서도 고무된 기분을 유지하게 한다.
이 기획은 동아시아에서 적중했다. 대만은 물론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지 못하고도 지난 17일 개봉 6일 만에 7만 관객을 돌파했다. 가장 놀라운 성과는 중국에서의 흥행이다. 영화의 배경인 1994년은 중국이 경제 성장을 이루기 전이다. 영화가 그린 미국문화 등에 대한 동경에 반응할 만한 요소가 적다. 하지만 영화는 흥행 신드롬을 일으켰고, 훤칠한 키에 시원한 미소로 마음을 녹인 왕대륙은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우리나라 연예기획사들이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다. 최근 아이돌 스타들은 독립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거나 상업영화에서 주·조연을 맡아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카트(2014년)', '순정(2015년)'의 도경수(23), '글로리데이(2015년)'의 수호(25), '엽기적인 그녀2(2016년)'의 빅토리아(29)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배우로서 입지를 다진 경우는 도경수뿐이다. 대부분이 흥행 실패를 맛보고, 배우로서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했다. 나의 소녀시대처럼 잘 기획된 작품에 출연해 아시아 시장에서의 입지를 굳히는 건 어떨까. 영화의 모양새나 평도 중요하지만 이런 영화는 예외다.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 막대한 수입도 기대할 수 있다. 이거야말로 '창조경제' 아닐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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