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싱의 경제학', 금융사기를 비롯 인간활동 전 분야서 속임수 통해 이윤추구하는 사례 다뤄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슈퍼마켓에서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제품은 달걀과 우유. 이 물건들은 대부분 매장 맨 뒤쪽에 배치돼 있다. 소비자가 매장을 빙 둘러가다가 깜빡 잊고 있던 물건이 생각나거나, 즉흥적으로 다른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계산대로 왔을 때 캔디와 잡지, 담배가 놓여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상품을 구매할 때 큰 액수를 지불하는 자동차. '바가지'인 경우가 허다하다. 자동차 영업사원은 온갖 옵션 기능을 강조하며, 결국 소비자에게 많은 비용을 더 얹어 자동차를 구매하게 만든다. 그런 기능이 사실은 나중에 별 필요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미국의 한 판매사원은 "50%의 이익을 10%의 고객으로부터 거둔다"고 할 정도다.
지난해 미국에서 발간된 '피싱의 경제학'이 최근 한국어판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현실 경제에서 개인들이 '아무도 원하지 않았을'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주목, 특히 피싱에 당하는 여러 사례와 연구들을 종합했다.
피싱(Phishing)은 개인 정보(Private data)와 낚시질(fishing)의 조합어다. 보통 소비자를 교묘히 속여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빼가는 사기수법을 말한다. 하지만 이 책에선 피싱을 금융사기 수법에 국한하지 않고 경제, 정치를 비롯한 인간 활동의 전 분야에서 사기와 기만, 속임수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로 확대해 정의했다.
사회는 풍요로워졌지만 개인은 항상 돈 걱정을 해야 하고 금융과 거시경제의 불안은 날로 커지고 있다. 수명이 연장됐고 먹거리가 넘치지만 건강에 대한 걱정은 더 많아졌다. 이 책은 이 같은 현상들 역시 '아무도 원하지 않았을 결정'이 만연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또한 전통적 경제학 이론에서 깔고 있는 '개인은 최선의 결정을 내린다'는 전제를 실제에 적용하기란 무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장경제의 보이지 않는 낚싯바늘'. 이윤 추구가 극대화된 세상에서 누구나 피싱의 '호구'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의 판단을 조종하고 왜곡하는 피싱은 비유하자면 "정상 균형 상태를 이룬 인체에 둥지를 트는 암세포와 비슷하다." 제대로 된 법망이 없을 때 여기저기서 피싱이 이뤄지면(공급), 이를 피하지 못하고 걸려드는 소비자(수요)와 함께 '피싱균형'을 형성한다.
거의 모든 경영자와 기업이 소비자의 지출을 유도하는 자유 시장은 계속해서 피싱과 같은 유혹을 만들어낸다. 책에서는 슈퍼마켓에서의 물건구매를 비롯해 자동차와 주택 구입, 신용카드, 술과 담배 등 다양한 상황에서 빚어지는 피싱의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신용카드의 경우 소비자 자신도 모르게 지출을 더 많이 하도록 유도한다는 연구결과와 함께, 신용카드 회사가 가져가는 수수료 중 6분의 1이 연체수수료였음을 적시하고 있다.
책은 정치 분야에서의 '피싱' 사례도 짚고 있다. 4.13 총선을 앞두고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과거 미국의 한 정치인이 수백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모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집에서 '우리와 똑같이' 잔디 깎는 기계를 미는 사람으로 묘사한 TV광고를 내보낸 적이 있었다. 그의 선거 유세에 돈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유권자들은 지극히 평범하다는 이미지 하나에 매혹되어 그를 뽑았다.
이 책의 공저자인 조지 애커로프 UC버클리대 경제학 교수와 로버트 쉴러 예일대 경제학 교수는 경고한다. "자유 시장경제는 선진국 국민에게 과거 세대가 선망의 눈길로 보기에 충분한 높은 생활수준을 안겨주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된다. 현대의 자유 시장은 바보를 노리는 피싱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런 피싱 역시 우리의 행복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조지 애커로프ㆍ로버트 쉴러 지음/조성숙 옮김/알에이치코리아/1만9000원)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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