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속 기업들 "공정거래법 너무 엄격" 토로
대법원 '기업 친화적' 판결 늘어
공정위 "불경기 고려 대상 아니지만 패소 위험 높아져 제재 쉽지 않아"
[아시아경제 오종탁 기자]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주요 불공정 혐의 사건에 잇달아 '무혐의' 등 솜방망이 처분을 내려 그 배경이 주목된다. 불황 속 기업들의 볼멘소리, 총선을 앞둔 정치권 분위기, 패소에 대한 위험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23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3사의 설 명절용 선물세트 값 담함 의혹을 사실상 무혐의로 일축하자 앞서 발표된 일련의 처분과 맞물려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관련 기사-공정위, '명절 선물세트값 담합 의혹' 대형마트 3사에 사실상 무혐의 처분
공정위는 지난해 12월 케이티(KT)의 계열사 부당 지원 사건과 스크린골프 1위 업체인 골프존의 가격 담합 의혹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KT는 KTM&S가 운영하는 직영대리점 300여곳과 일반 개인이 운영하는 위탁대리점 1800여곳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휴대전화를 판매하면서, 직영대리점에 관리 수수료를 1∼2%포인트 더 지급해왔다. 골프존 본사와 판매법인 4곳은 스크린골프 프로그램 가격을 수직적으로 담합해 점주에 판매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들 기업의 의혹을 벗겨준 공정위는 이어 올 1월에는 이디야의 가맹사업법 위반 혐의도 무혐의로 결정했다. 이디야 본사는 판매장려금을 받는 대가로 매일유업 측이 가맹점에 공급하는 우윳값 인상을 허용해 가맹점주들에게 불이익을 줬다는 혐의를 털어냈다.
그러다 공정위가 지난 18일 에스케이텔레콤(SKT), KT, 엘지유플러스(LGU+) 등 이동통신 3사와 함께 '무제한 요금제' 피해 보상 방안을 내놓자 '기업 봐주기' 논란은 더욱 커졌다. 이날 공정위와 이통 3사가 공개한 잠정 동의의결안에는 'LTE 무제한 요금제'라고 허위·과장 광고한 이통 3사가 피해를 본 소비자들에게 LTE 데이터 쿠폰을 준다는 내용 등이 담겼는데, "미비할 뿐더러 적절치도 못하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보상 규모가 2679억원에 달한다는 공정위·이통 3사 홍보와는 달리 이통사들 입장에선 트래픽 증가 외에 별다른 추가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비난 여론에 대해 장덕진 공정위 소비자정책국장은 "만약 공정위에서 이통사들에 표시광고법 위반 과징금을 부과했다 하더라도 액수가 3사 합쳐 최대 80억원에 그쳤을 것"이라며 "이마저도 (과징금 처분에 불복하는) 기업들과의 소송전으로 번지면 공정위가 패소할 위험이 있어 소비자 피해 보상이 더욱 힘들어질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과징금 사건 관련 소송에서 진 경험 탓에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공정위는 근래 수천억원대 과징금 판결에서 줄줄이 패소했다. 작년 2월 주유소 원적지 담합과 같은 해 12월 발생한 라면 가격 담합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대법원은 공정위 주장과는 달리 '과점 사업자 간' 담합이라고 볼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며 두 사건에 대해 원고(기업) 승소 판결했다. 이 두 사건에서 공정위가 토해낸 과징금 규모만 약 4000억원에 달한다. 올해 들어서도 대법원은 '일감 몰아주기'를 이유로 공정위가 SK그룹에 부과한 350억원대 과징금 처분에 대해 지난 10일 전격 무효 판결을 내렸다.
이와 관련, 공정위는 "대법원이 더욱 정교하고 과학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설명했지만, '기업 도와주기 판결'이라는 지적도 힘을 얻고 있다. 어려운 경제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기업들은 엄격한 공정거래법 집행에 대한 불만을 직·간접적으로 토로해왔다. 다음 달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도 '경제 살리기'가 화두가 되면서 법원이나 정부도 이를 무시할 순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의 한 당국자는 "사실 공정위 조사 시 불경기나 기업들의 애로사항 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법원 판결"이라며 "요즘 들어 대법원에서 '공정위 과징금이 수천억원대를 왔다갔다하는데, 형사 사건에 준하는 (90% 이상 확신이 들 정도의) 입증 책임이 필요하다'고 요구 수준을 올린 통에 1심 기능을 하는 공정위 입장에서도 기업 제재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세종=오종탁 기자 tak@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