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업무보고 들여다보면 뭐합니까. 국회만 가면 함흥차사인데."
한 대기업 임원은 최근 정부부처의 새해 업무보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같이 말했다. 매년 연초 정부부처들은 그해의 업무계획을 대통령에 직접 보고한다. 예산안이 세금과 기금 등의 쓰임새를 정하는 것이라면 업무보고는 각 부처 소관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보고하는 것으로 민생에 직결되는 사안들이 대다수이고 기업경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일 각 부처의 업무보고만 봐도 '창조경제 등에 정책금융 80조원 투입' '규제프리존 고용프리존 구축' '바이오헬스 새 일자리 5만개 창출' 등이 제시됐다.
기업 입장에선 정부 업무보고대로 추진된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기업들 사이에서 업무보고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국회 때문이다. 정부 부처의 핵심사업은 대부분이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정부가 직접 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하거나 국회의원의 힘을 빌려 의원발의를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법 개정안 중에서도 규제를 풀거나 감면을 확대하는 이른바 경제활성화법안은 정부가 예상한 일정대로 국회를 통과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경제계가 입법촉구 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는 경제활성화법안도 해묵은 법안들이다. 교육과 의료 등의 서비스산업을 육성하자는 내용을 담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제정안은 19대 국회가 시작된 2012년 7월에 정부입법으로 발의됐지만 19대 국회가 끝나가는 현재까지도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기업의 사업재편과 자발적이고 선제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기업활력제고특별법도 의원발의는 지난해 이뤄졌지만 공론화는 2, 3년 전부터 있어 왔다. 현재 사업재편을 진행하는 특정 기업의 특혜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19대 국회에서 이들 법안이 처리되지 못하면 자동폐기되고 20대 국회에서 법안을 다시 제출해야 하는 등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번 업무보고 시즌에 정부부처들이 쏟아내는 장밋빛 사업들도 결국 20대 국회가 쥐고 있는데 전망도 밝지 않다. 총선이 끝나면 바로 대선정국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걱정거리는 더딘 경제활성화 속에서 엄습하는 경제민주화의 그림자다. 총선과 대선정국에서 정치권이 포퓰리즘 경쟁을 하면서 2012년 경제민주화 열풍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의 상징인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의 행보에도 재계는 긴장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대선 때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맡아 초강경 재벌개혁 카드인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대규모기업집단법 제정' '주요 경제사범 국민참여재판' 등을 제시했다. 당시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재벌 옥죄기'로 비칠 소지가 있어 공약에서 대부분 제외됐다. 그러나 이들 카드가 여야의 표심 경쟁 속에서 다시 공론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경제는 정쟁의 대상이 아니다"는 기업인들의 절박한 호소에 국회가 조금이라고 귀를 열어주길 바란다.
이경호 산업부 차장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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