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정신대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데도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정확한 해명과 사과는 물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정부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때까지 매주 수요일 낮 12시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가질 계획입니다."
단일 주제로 세계 최장 기록을 갖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수요 집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1992년 1월8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첫 집회 때 공동대표를 맡고 있었던 이효재 전 이화여대 교수가 외쳤던 이 말은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천되고 있다.
수요집회가 이번 주 24주년을 맞았다. 1995년 고베 대지진과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를 제외하고 단 한 주도 거르지 않은 수요집회는 6일 1212회차를 기록했다. 꽃다운 10대를 짓밟힌 소녀들은 반세기 만에 모습을 드러냈고 첫 집회 때 60대였던 할머니들은 이제 아흔 줄에 들어섰다.
지금이야 강제성이 부각된 '강제 성노예(enforced sex slaves)'라는 용어가 적절하다는 움직임도 있지만 정대협의 첫 집회가 열릴 때만 해도 지금의 위안부라는 단어는 낯설었다. 집회를 주최한 측에서도 정신대라는 말을 썼고 언론에서도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이 통용되던 시기였다.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내가 그 피해자요"라며 공개증언을 하기까지 우리 사회는 그들의 존재를 애써 외면한 데다 알아도 입 밖에 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그래서 더 아픈 과거사를 왜 들추느냐고 손가락질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24년 전 그날 할머니들은 상복을 연상시키는 생베옷을 입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꽃다운 청춘을 빼앗긴 그 순간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라며 죽음을 상징하는 생베옷을 걸친 것이다.
피해 할머니들이 워낙 고령인데다 생존자가 46명에 불과하다는 촉박함 때문일까 한일 정부는 지난해 말 위안부 협상을 '타결'지었다. 하지만 수요집회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일본 측이 그간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이전·철거 논란이 일어서다. 6일 새해 첫 집회에는 지방자치단체장들까지 가세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날 수도권 자치단체장 32명은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됐다"며 한일 위안부 협상이 무효라는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전면 재협상을 촉구했다.
첫 집회 이후 지금까지 이 땅엔 여섯 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갈등 중에서도 난제로 꼽혀 왔다. 그래서일까 협상 타결 이후 박근혜정부는 "어느 역대 정부도 해내지 못한 최선의 결과"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과 많은 일반 국민들의 생각은 정부의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2년 전 필자는 당시 55명의 생존 할머니들을 찾아 더 늦기 전에 그분들의 아픈 기억을 기록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위안부 보고서 55'를 기획해 취재에 참여했다. 그때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처음 알리고 평생 연구했던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가 던진 한마디 말은 아직도 울림이 크다. "할머니들을 너무 험하게 대했잖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과 관련 기록들을 담은 '위안부 보고서 55'는 별도로 제작된 사이트(http://story.asiae.co.kr/comfortwomen/)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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