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은정 기자]지속되는 저유가에 금융당국을 속을 태우는 것은 저유가가 우리 경제의 최대 리스크로 부상했는데도 마당한 대안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올해 재정적자가 사상 최대인 980억달러에 이를 정도이다보니 한국 금융시장에서도 '오일머니'가 급속히 발을 빼고 있다. 한국은행이 저성장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초유의 물가 띄우기에 나섰지만 저유가 상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물가 하락과 경기 침체가 동반되는 디플레이션 공포도 커지고 있다.
■ '오일머니' 엑시트= 2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외국인은 11월 한달동안 국내 상장주식 1조1680억원치를 매도했다. 사우디 자금은 이미 9월 9463억, 10월 1조8965억치를 팔아치웠고 이후 계속 매도세를 이어가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유가가 떨어질수록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중동계 자금 이탈은 더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외화예금도 줄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1월 말 외화예금 잔액은 623억1000만 달러로 전월 대비 10억9000만 달러 감소했다. 달러화 예금은 공공기관의 외화채권 상환 등을 위한 자금 인출로 전월 대비 8억3000만달러 감소한 486억2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금융당국도 달러화 예금 감소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고물가' 추진 한국은행 곤혹= 유가의 지속적인 내림세에 한국은행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내년부터 3년간 적용될 물가안정목표를 2%로 제시하고 물가 하방을 막는 '디플레(디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적극적인 경기부양 정책을 펼쳐나가겠다고 공언했지만 키포인트인 유가가 좀처럼 힘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에 따르면 내년 1월 발표되는 수정 경제전망에서 유가 전망치 하향 조정에 따른 성장률, 물가상승률 등 경제지표 전망치의 동반 하향 가능성이 크다.
한은은 앞서 지난 10월 경제전망 당시 내년 원유 도입 단가를 배럴당 58달러로 추정해 소비자물가상승률 1.7%를 예상했다. 하지만 두바이유 가격이 이달 들어 지속적으로 저점을 낮추고 있어 내년 원유 도입 단가의 하향 조정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10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유가하락이 내년 물가에도 상당 부분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추가로 기준금리를 내려 물가 띄우기에 나서는 방법이 있지만 이 역시 위험이 뒤따른다. 기준금리를 내리면 내외 금리 차 축소로 국내 증시와 채권시장 등에 들어왔던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금리 인상 직후 국내 금융시장은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내년 3월께 미국이 추가 금리 인상을 단행하고 중국이나 브라질 등 신흥국의 위기가 겹친다면 안심할 순 없다.
한은은 "유가에 물가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한은이 선택할 수 있는 보기가 많지 않다. 저유가를 방어하는 물가 관리를 하면서 국내 경기를 살려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커지는 'D의 공포'= 일반적으로 국제유가 하락은 비용 감소 효과를 가져온다. 물가가 떨어져 소비와 생산이 늘고 기업 투자 심리도 좋아진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 세계적인 수요 부족 탓에 유가 하락에도 구매력 상승, 소비ㆍ생산ㆍ투자 증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저유가로 세계적인 유효수요가 부족하게 되면 수출 단가가 떨어져도 수출 물량이 늘지 않는다. 특히 산유국의 '오일머니'가 빠져나가면서 신흥국 위기가 대두되고 있다.
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실장은 "저유가는 소비자물가 하락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로 글로벌 경기침체와 수요 부족의 결과일 수 있다"면서 "유가하락으로 인해 산유국 경기가 나빠지면 글로벌 경제에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고 말했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제유가가 내년에 소폭이라도 반등한다면 디플레이션 우려는 완화될 여지가 더 크다"면서 "그렇지 않고 소비자들 사이에 디플레이션 기대가 형성돼 자기실현적 예언에 따라 물건을 사지 않고 기업도 생산이나 투자를 줄이게 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은정 강구귀 구채은 기자 mybang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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