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 대규모 아카이브 조성
서성환 창업주 뷰티열정 고스란히
앰배서더 호텔, 역사관 '의종관' 열어
[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이따금 '과연 맞게 가고 있나' 의심스러울 때에도 마찬가지다. 오래 걸을수록 지난 자리를 되짚거나 왜 출발했는지를 기억해내는 게 어렵다. 과거를 수시로 복기해야 앞으로의 방향이 분명해지고, 목적지에 도달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국내 대기업들이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 그 자리'를 찾고 있다. 이들이 재조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헤리티지(Heritageㆍ유산)'. 치열해지는 시장경쟁과 장기불황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창업주의 기업가 정신, 지난 1세대 공산품을 떠올리며 신발끈을 다시 조이는 작업인 셈이다.
첫 행보는 회사 설립의 주역인 창업주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K뷰티 신화의 주역, 아모레퍼시픽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 9월 창립 70주년을 기념해 경기도 오산 뷰티사업장에 회사의 모든 발자취와 역사를 전시한 대규모 아카이브를 설립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서성환 선대회장의 '꿈과 신념'을 주제로 꾸민 별도의 공간이다. '서성환의 방'으로도 불리는 이 곳은 창업자의 젊은 시절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과 원숙한 모습의 초상화, 상념들을 기록한 친필 메모를 진열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이와 함께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를 발간해 선대회장이 걸어온 여정을 상세히 담았다. 1932년 동백기름을 팔며 아모레퍼시픽의 모태가 돼 준 선대회장의 모친이자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조모 윤독정 여사에 대한 회고도 빠지지 않는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아카이브 개관날 "최고의 원료만을 골라쓰던 할머니의 고집과 '남다른 제품'을 입에 달고 사셨던 아버지의 원칙주의가 오늘날 뷰티한류를 일으킨 제품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도 했다. 회사 관계자는 "아시안 뷰티 개척자라는 사명감과, 향후 중동 등 새로운 시장 진출에 앞서 창업주의 첫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라고 아카이브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최근 계열사 구조조정과 경영권 승계 문제로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는 삼성그룹 역시 마찬가지다. 삼성은 내년말을 목표로 그룹이 태동한 대구 옛 제일모직터에 역사관을 짓는다. 내년 12월 완공 예정인 역사관 안에는 창업주 고 이병철 선대회장의 집무실을 재현해 놓는다. 삼성의 역사를 소개하는 시설인 삼성상회와 창업기념관 등이 들어선다. 삼성상회는 1938년 이 선대회장이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한 치 앞 안보이는 불투명 경영환경
'과거를 통해 미래 보겠다' 의지
지난해부터 밀려드는 중국인관광객에 즐거운 비명을 지었던 호텔업계의 초심찾기도 진행중이다. 호텔 전문 기업인 앰배서더 호텔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지난 9월 박물관 '의종관'을 남산 자락에 오픈했다. 단독 건물 형태의 호텔 박물관으로는 국내 최초다. 박물관은 앰배서더 호텔그룹의 창업주인 고(故) 서현수 선대회장과 서정호 회장이 실제 생활했던 저택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그룹의 태동기부터 시대별 발전상을 스토리 형식으로 풀었고, 시대별 유니폼도 담았다.
기업 또는 브랜드가 이제껏 내놨던 제품이나 경쟁사를 포함한 산업의 발자취를 되짚고 이를 전시하는 형태의 작업도 곳곳에서 진행중이다. 아모레퍼시픽 오산 아카이브의 경우 화장품 산업의 현대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 수준의 집대성으로 이목을 끌기도 했다.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해외 럭셔리 브랜드들도 비슷한 행보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최근 브랜드 역사 전시를 개최했던 디올이 대표적이다. 총 10개 테마, 11개의 방으로 구성된 전시에는 수백여점의 디올 드레스와 구두가 진열됐다. 1950년대 창립 초기의 제품부터 가장 최근의 컬렉션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럭셔리 브랜드 가운데 과거 컬렉션을 이정도 수준으로 보존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전시를 소개한 큐레이터는 "역사의 보존이 바로 명품의 조건"이라고 했다.
한 재계 임원은 "업종을 막론하고 헤리티지가 없다면 글로벌 명품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다"면서 "최근 수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브랜드가 쏟아지고 히트상품이 나오지만, 이들이 모두 명품으로 취급받지는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단순히 오래된 기업이 살아남는다는 논리가 아니라 도전의식과 사명감을 잃지 않고 버텨온 기업이 뿌리를 잊지 않을 때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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