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선 파이 키우기, 공생 등으로 포장하지만
흰국물 라면ㆍ과일소주처럼 반짝 인기 우려
[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최서연 기자] # A기업의 간부들은 신제품을 출시할 때 해당 디자인의 '성공사례'가 있는지를 가장 먼저 따진다. 베낀 것만 출시한다는 얘기다. B기업의 제품 개발 첫 단계는 '길거리에서 사진찍기'다. 하루에도 수천장씩 사진을 찍어 스타일과 컬러별로 분석한다. 그리고는 공통분모를 꼽아 최근 가장 선호되는 디자인으로 만들어낸다. C기업에서는 '경쟁사 제품 R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경쟁사의 물건을 리엔지니어링한다는 얘긴데, 사실상 카피다. 간부들은 "어디까지 베껴야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지"에 대한 '카피 가이드라인'을 주기도 한다.
국내 유통업계의 베끼기 관행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패션, 화장품, 식품 등 각 분야의 '미투(Me tooㆍ모방)제품' 양산은 그 속도와 수법이 점차 고도화되는 분위기다.
합리적인 가격과 탁월한 품질로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는 화장품 업계는 수면 아래에서 카피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피해업체와 가해업체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각 브랜드가 서로의 제품을 본따 만든다. 올 여름 히트상품이던 대나무수 젤 제품이 대표적. 토니모리, 더샘, 더페이스샵, 비욘드, 니베올라, 듀이트리 등 복수의 업체에서 유사한 시기에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대나무추출물을 함유했고, 대나무의 마디 등 외형을 본따 패키지를 구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밖에 특정 브랜드의 핸드크림, 수분크림, 립글로스 제품 등이 인기를 얻으면 패키지 디자인과 성분 등을 베껴 만든 제품이 수개월 내에 다수의 브랜드에서 출시되는 형국이다.
패션업계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브랜드의 머플러, 양말 같은 잡화 제품을 베껴 만든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랜드와 삼성물산 패션부문(당시 제일모직) 등 패션 대기업이 자체 브랜드를 통해 중소 디자이너 브랜드의 것과 유사 제품을 출시했다가 회수하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식품업계에서는 국제 소송이 진행되기도 한다. 8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2부는 일본 제과업체 글리코가 롯데제과를 상대로 낸 디자인권 침해금지 등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밝혔다. 롯데제과의 '빼빼로 프리미어' 상자 디자인이 2012년 글리코가 출시한 '바통도르'의 디자인과 매우 유사하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법원은 제품이 흡사해 롯데제과가 글리코의 영업상 이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미투 제품 양산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수익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대기업의 제품 개발ㆍ생산 양식이 꼽힌다. 각 업계에서 진행하는 일명 '은행작업'도 그 일부다. 업체에 따라 명칭은 다르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경쟁사 및 인기 중소브랜드의 신제품을 전수조사하고 브랜드, 가격, 제조사, 주요 성분 등을 정리해 데이터베이스(DB)화 한다. 대외적으로는 제품 콘셉트의 중복이나 카피논란을 막기 위한 과정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기업은 이를 구미에 맞는 제품을 추려 베끼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
간부급 인사들의 의식 개혁이 절실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A기업 소속의 한 직원은 "새로운 디자인을 보고하면 임원들은 이것이 어느 브랜드의 제품인지, 잘 팔리는 제품인지를 묻는다. 기존 모델이 있어야만 론칭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고, B기업에서 근무중인 한 관계자는 "내부 부장급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때는 경쟁사 제품이 예쁘면 몰래 단추를 떼어서 가져오기도 했다. 요새 디자이너들은 이런 근성이 없다'면서 화를 내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파이(시장) 키우기, 또는 공생으로 포장되는 미투 제품 양산은 결국 '공멸'로 향한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2011년 8월 팔도 '꼬꼬면'의 출현 이후 삼양 나가사키짬뽕, 오뚜기 기스면 등의 아류작이 따라붙으면서 갑작스레 흰 국물 라면시장이 형성됐지만 그만큼 빨리 매대에서 사라졌다. 달콤한 맛에 여성들의 호응을 얻었던 과일맛 소주도 마찬가지다. 인기가 폭발적이던 올해 7월과 비교해 지난달 매출은 대부분의 유통채널에서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허니버터칩이 몰고 온 '허니열풍' 역시 식품업계에 사그러드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비슷한 제품을 쏟아내는 것을 공생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공멸로 가는 사례가 더 많다"면서 "식품, 패션, 화장품 등 대부분의 유통시장 영역에서 자정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한류 확산으로 국내 브랜드의 다양한 제품들이 해외로 수출되고,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의 수요도 급증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경쟁력을 갖춰야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최서연 기자 christine89@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