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안보여도 커피맛은 보여요"
실로암복지관 운영 '카페모아'서 5년째 근무
"장애인 수식어 떼고 맛과 향으로 승부"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제가 만든 커피를 고객이 맛있어 할 때 칭찬받은 기분이 들어요. 언젠가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수식어를 떼고 바리스타로서만 당당히 인정받고 싶네요."
1급 시각장애를 지니고도 5년째 바리스타로 활동하는 윤혜원(25)씨의 바람이 소박하다. 중증 시각장애인,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 장애인의 직업 활동이 제한된 현실에서 어엿하게 경제활동을 하며 고등학교 졸업동기와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돼주고 있는 그를 만났다.
3일 오후 2시 '카페모아(Cafe More)' 가산점을 찾으니 보라색 유니폼 상의와 검정색 앞치마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윤씨가 점심식사 후 카페를 찾은 손님들을 응대하며 바쁘게 주방을 오가고 있었다. 시력이 약한 탓에 행동이 다소 조심스럽고 고객의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지만 포스(POSㆍ판매정보시스템)를 능숙하게 다루고 주문서대로 음료를 재빠르게 만들어내는 모습은 여느 평범한 바리스타와 다를 바 없었다. 기본 음료는 물론 고객 연령층에 따라 입체적인 라테 아트도 선보이며 손재주를 뽐냈다.
윤씨는 "카페에서 일한다고 하면 가끔 놀라시는 분들도 있다"며 "시각장애인이라고는 해도 에스프레소 기계를 다루고 라테와 카푸치노 등 다양한 커피 메뉴를 만드는 덴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보라색 표지로 장식된 메뉴판 갈피마다 덧붙여진 투명한 재질의 점자 메뉴가 고객과 윤씨의 소통을 돕는다. 아메리카노를 비롯한 커피류가 2500~4000원, 쿠키와 베이글 등의 디저트는 1000~5500원으로 메뉴 이름과 가격이 큼지막한 글씨로 보기 좋게 새겨져 있다.
윤씨가 일하는 카페모아는 사회복지법인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이 2009년 세계 최초로 시도한 시각장애인 고용 커피전문점이다. 2010년 서울맹학교 졸업 후 1호점인 봉천본점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지난달 15일 5호점인 가산점이 개점하면서 근무지를 옮겼다.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 내 빌딩가에 위치한 43㎡(13평) 규모의 새 매장에는 윤씨와 함께 바리스타카페창업훈련 1기 과정을 수료한 김선영, 문선영 바리스타가 합류했다.
그의 일과는 비교적 단순한데 오전 7시에 일어나 8시까지 매장에 출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집이 있는 구로구 천왕동까지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은 30분 남짓이며, 오후 4시 혹은 매장 마감 시간인 8시까지 일하고 일요일엔 쉰다. 퇴근 후나 주말엔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거나 야외에서 보드를 배우며 여가를 즐긴다.
윤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진학도 고려해봤지만 카페모아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일을 먼저 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한번 해보라'며 외동딸을 격려한 부모님과 주변 지인들은 꾸준히 일에 매진하는 그를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집에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감이 크다"며 "다행히 부모님도 좋게 봐주시고 5년 차에 접어들어 자신감도 붙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는 올해 3월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2015 전국장애인바리스타대회'에 동료들과 함께 출전, 은상을 차지하는 쾌거도 이뤘다. 시연 시간 15분 안에 주어진 과제를 충실히 해냄으로써 비장애인 바리스타에 뒤지지 않는 역량을 드러냈다. 특히 열과 성을 다해 커피의 맛과 향에 집중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조금은 달라졌다는 게 재단 측의 평가다.
윤씨는 "저를 통해 시각장애인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많은 분들이 우리를 보고 꿈을 키웠으면 한다"며 "용기건 패기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일단 부딪혀 봐라"고 조언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커피 공부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해서 '시각장애인 바리스타'가 아닌 '최고의 바리스타'라는 타이틀로 고객들과 만나고 싶다"고 덧붙였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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