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원세훈 지시로 국정원 대선개입"…곤혹스러운 황교안 장관, '신년사 부메랑'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사이버 활동은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 지시에 따른 것이며, 국정원장 지시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일탈한 행위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9일 서울고법 형사 6부(부장판사 김상환) 판단은 분명했다. 254쪽에 이르는 판결문의 요지는 국정원이 2012년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했다는 내용이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그 정점에 있으며, 그의 지시에 따라 대선개입이 이뤄졌다는 판단이다.
원세훈 전 원장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법조계에서 이러한 항소심 결과를 예측한 이들은 드물었다. 검찰은 ‘승리’를 거뒀지만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고, 여유 있게 결과를 기다렸던 원 전 원장은 더 당혹스러운 결과였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사안의 민감성만큼 시선을 모았던 사안이고, 법조계의 맨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다. 2014년 ‘올해의 한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선정된 것은 원세훈 전 원장 1심 판결이 주된 배경이었다.
당시에도 국정원 댓글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정치에는 관여했지만, 대선에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판단으로 공직선거법 무죄 판결을 내렸다. 판결이 나오자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게시판에 글을 올려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을 할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니…’ 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현직 부장판사의 쓴소리가 나오면서 법원의 1심 판결은 여론의 조롱거리가 됐다. 1심 판결은 ‘상식의 눈’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2심 판결은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참여연대는 서울고법 판결에 대해 “국민의 상식에 부합하는 판결이며, 민주주의와 정의를 바로 세우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법원이 지록위마 논란으로 홍역을 앓았다면 검찰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원세훈 사건’은 검란(檢亂)이라고 불릴 만큼 검찰 내부의 살벌한 충돌로 이어졌다.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에 대해 칼날을 세웠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검찰의 이런 행보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채동욱 전 총장은 ‘원세훈 수사’를 밀어붙이다가 혼외자 의혹이 불거지면서 불명예 퇴진했다. 수사팀을 이끌던 윤석열 팀장 역시 좌천성 인사의 대상이 돼야 했다.
결과적으로 황교안 장관의 ‘버티기’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울고법이 항소심 판결에서 국정원 대선개입을 인정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채동욱 전 총장과 윤석열 팀장의 판단이 옳았으며, 황교안 장관의 ‘버티기’가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법원의 판결이었다.
법원과 검찰, 법무부가 이번 사안을 놓고 보여준 모습은 법조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법을 다루는 이들이 균형 있는 ‘법의 잣대’를 토대로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줬다. 권력의 입맛에 부응하고자 정치적 고려에 따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다. 특히 황교안 장관은 곤혹스러운 처지가 됐다. 황교안 장관은 새해 신년사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우리 사회에는 법을 어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런 낮은 법질서 의식은 사회 통합과 국가 경쟁력 제고에 장애가 됩니다.…헌법 가치를 지키는 것이 법과 질서를 지키는 출발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황교안 장관 신년사는 스스로 곱씹어볼 내용을 담고 있다. 법을 어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누구인지, 또 누가 그들을 비호하고 있는지 서울고법 판결에 그 해답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