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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이덕무가 책을 베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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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이덕무가 책을 베낀 시대 백우진 국제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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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책 수백 권을 베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덕무는 자신을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痴)라고 칭할 정도로 독서에 몰두했다. 그러나 살림이 곤궁해 책을 구입할 수 없었다. 그런 이덕무에게 책 베끼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가 문신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에서 그 마음이 전해진다. "그대가 내게 장서(藏書)를 맡겨 베껴 쓰고 교정을 보고 평점까지 맡기려 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이덕무는 용서(傭書ㆍ책 베끼기) 도중 자신을 위해 한 부 더 적었다. 그렇게 마련한 자신의 책으로 공부했다. 정민 한양대 교수는 "그는 베껴 쓰기로 학문을 이루어 남이 넘보지 못할 우뚝한 금자탑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정민의 세설신어ㆍ용서성학ㆍ조선일보 2015.1.7)


나는 이덕무 이야기에서 다른 측면을 봤다. 가난한 이덕무는 책을 필사하는 품을 팔아야 했지만 형편이 되는 사람도 용서를 통해 책을 장만했다. 왜 그랬을까.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고 출판사도 없었고 민간 인쇄소도 없었다. 그래서 고전도 새로 찍혀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조선시대에 책을 얻는 방법은 극히 제한됐다. 왕으로부터 하사받거나 중국에 가는 사람에게 책을 사달라고 부탁하거나 지방 고을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그곳에 있는 목판으로 책을 찍어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대다수 선비들은 책을 빌려서 직접 베끼거나 남에게 필사하도록 했다.


조선은 출판을 나라에서 독점하고 통제했다. 조정은 어떤 책을 얼마나 간행할지, 어디서 출판할지 결정하고 중앙 관청이나 지방 감영에 그 일을 맡겼다. 강명관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서 "서적 인쇄를 국가가 독점한 것이 민간 인쇄출판업의 발달을 막았고 서적 공급량을 확대하는 데도 장애물이 됐다"고 설명한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대표적인 실학자의 저서도 출판되지 않았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인쇄됐다. 그렇다면 실학자들의 연구는 뜻을 같이 한 실학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됐을 공산이 크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구텐베르크 인쇄술로 전파된 것처럼, 생각은 인쇄ㆍ출판이라는 물질적인 기반을 통해 확산된다. 실학이 조선에서 공론이 되지 못한 요인에는 이 기반이 없었다는 사실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백우진 국제부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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