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강욱 기자] 최악의 실적 부진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SK이노베이션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정철길 신임 총괄사장이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물론,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과도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어 화제다.
정 사장은 최 회장이 회장직에 오른 30대부터 그를 근거리에서 보좌해 온 인물로 유명하다.
1990년대 SK에너지(옛 유공)에 입사한 최 회장은 이후 아버지인 최 선대회장의 갑작스런 작고(1998년)와 이어진 그룹 위기로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손길승 회장과 함께 그룹을 이끌었지만 30대의 젊은 나이여서 난관을 넘기에는 힘이 부쳤다. 검찰수사, 기업의 구조조정, SK네트웍스 사태 등 현안이 산적했다.
이 때 최 회장에게 힘이 된 사람이 정 사장이었다. 정 사장은 최 회장이 SK그룹 회장직에 취임한 1998년 그룹 구조조정추진본부 인력팀장(상무)으로 발탁된 이후 최 회장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며 그룹 위기 돌파의 산파역을 했다. 당시 구조조정을 훌륭하게 마무리하면서 오늘날 SK그룹의 기반을 마련했다.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친 정 사장은 2010년 SK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SK C&C 대표로 취임했고 내년부터는 SK그룹 핵심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호(號)의 구원투수로 나서 위기 상황 타개를 진두지휘하게 됐다.
정 사장은 최 회장의 아버지인 최 선대회장과도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이 2008년 10주기가 되는 최 선대회장을 추모하기 위해 발간한 추모서적 '최종현, 그가 있어 행복했다'에서 정 사장은 1990년 미얀마에서 석유개발업무를 맡고 있었을 때 최 선대회장을 만났다고 소개했다.
당시 과장이었던 정 사장은 약 1년 반 동안 미얀마에서 석유개발업무를 맡고 있었다. 가족도 없이 같은 신세의 직원 20여명과 함께 지냈던 정 사장은 1990년 봄 양곤을 방문한 최 선대회장을 만나게 됐다.
홍콩, 태국 등 여러 나라를 거쳐 도착한 최 선대회장은 수펙스 김치와 된장을 한 보따리 풀어 놓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양이었다고 했다. 오죽 힘들었으면 당시 비서실장은 정 사장에게 "정 과장, 당신이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회장님이 이걸 싸들고 옵니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라고 핀잔을 줬다고 했다.
정 사장은 최 선대회장이 음식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아플 때는 어떻게 하는지 등 해외 주재 직원들의 일상생활을 꼼꼼히 챙겼다고 기억했다. 특히 최 선대회장이 한국으로 돌아간 한두 달 뒤에는 현장에서 사고가 나거나 긴급 환자가 발생할 경우 즉각 싱가포르에서 제트기가 날아와 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게 하는 'SOS 국제서비스'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정 사장은 최 선대회장이 평소 일의 실패 그 자체를 탓하거나 책임소재를 묻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누가 잘못했냐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나를 연구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이 1989년 미얀마에서 처음으로 독자 개발권을 획득하며 원유 탐사에 나서 4년간 무려 56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던 당시 사업의 결과는 대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정 사장은 귀국 후 오히려 특진을 했다.
정 사장은 "결과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했고 고생하고 돌아왔다는 최 선대회장의 배려 덕분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업계에서는 SK그룹의 선대 회장과 현 회장 2대에 걸쳐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정 사장이 SK이노베이션을 구하기 위해 조만간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실제 정 사장은 SK C&C 대표 시절 '위기는 곧 기회'라는 정신으로 중고차 매매와 메모리 반도체 모듈사업을 신사업으로 택하고 이를 성공시키며 업계를 놀라게 했다. 주력사업인 IT사업의 성장이 정체되자 새로운 수익원을 적극 키운 전략이 통한 것이다. SK C&C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정 대표 취임 이후 약 1.5배 상승했다.
업계 관계자는 "정 사장이 SK이노베이션 사령탑을 맡은 것은 최태원 회장으로부터 그룹 주력사업인 이노베이션을 구하라는 특명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면서 "위기돌파형 CEO로 평가되는 정 사장의 스타일답게 실적 개선을 위한 과감한 사업구조 재편 작업과 비용관리 및 리스크 관리에 중점을 둔 경영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강욱 기자 jomarok@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