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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자전거와 피임약의 기술사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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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자전거와 피임약의 기술사회성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경제금융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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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가치중립적이라고 한다. 같은 기술이라도 누가 사용하느냐,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라고 한다. 과연 사실일까? 실제 기술개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기술은 철저하게 'Technology for whom', 즉 '최초에 누구를 위한 기술로 개발되었는가?'에 따라 엄청나게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산업혁명 시대에는 저임금인 어린 청소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키가 작고 폭이 작은 방향으로 각종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자전거의 경우 최초에는 스포츠 전용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앞쪽 바퀴가 기형적으로 크고 높게 설계됐다. 그런데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왕성해지면서 긴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이 자전거의 새로운 소비층으로 등장했다. 앞뒤 바퀴가 동일하게 낮은 자전거, 앞에 장바구니가 달린 자전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자전거처럼 금방 설계 변경이 가능한 기술이라면 괜찮은데 한 번 굳어지면 바꾸기 힘든 기술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피임 기술이다. 부작용이 큰 여성용 경구용 피임약은 시중에 많이 개발된 반면 부작용이 적으면서도 효과적인 남성용 피임약은 이미 개발되어 있는데도 시장에 나가기가 어렵다. '피임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약은 아무리 효과성이 뛰어나도 대량의 임상실험을 거쳐야 하는데 임상에 참가하려는 남자들이 없는 것이다. 부작용이 적고 장기 복용이 가능한 고혈압약이 개발된 것도 고혈압 환자가 대부분 남성들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과학기술은 절대로 가치중립이 아니다. 따라서 여성이 소비주체로 등장한 시대에는 젠더(gender)적 특성을 고려한 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특히 급격히 고령화하는 시대에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조기구나 정보통신기술(ICT), 약품의 경우 여성과 노인이 훨씬 더 많은 소비자가 되는 현실에서 젠더에 따른 심리ㆍ사회ㆍ문화적 특성에 맞는 제품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세계적으로도 여성이 기술의 주된 소비계층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 큰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젠더 다양성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이미 중요한 연구지원 프로그램에는 반드시 젠더를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올해부터 시작된 대규모 연구개발 지원 프로그램인 'Horizon 2020'에서 연구자들이 젠더에 따른 특성을 어떻게 고려해 연구할 것인가를 명시하도록 의무화했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은 올해 10월부터는 동물과 조직을 사용하는 모든 실험에서 성별을 고려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여성 과학ㆍ기술ㆍ공학 인재들이 처한 현실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어렵게 공부해 기업이나 연구소에 취업해도 잠깐 출산휴직을 하고나면 낙오되기 일쑤다. 밤샘 실험을 할 때는 어린 자녀를 등에 업거나 옆에 데리고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단 여성 과학자들의 교수 채용 숫자가 적고 10억원 이상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이공계 대학의 여교수 비율은 0.5% 정도에 불과하다.


정부가 2018학년도부터 고등학교에선 문ㆍ이과 계열을 구분하지 않고 공통과목으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문ㆍ이과 통합형 교육을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 창조력을 갖춘 창의ㆍ융합형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창의ㆍ융합형 인재는 문ㆍ이과의 통합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기술적 공존에서도 함께 모색되는 것이 옳다.


더 늦기 전에 고학력 여성 과학ㆍ기술 인력이 사장되지 않도록, 혹은 미래의 잠재적 여성 인력을 키우기 위해 종합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인용 사례: 여성과총 과학기술연구의 젠더혁신 포럼 보고서 참조)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경제금융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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