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민정당 후보가 맞붙은 1963년 5대 대통령선거는 여러 면에서 여느 선거와 달랐다. 군정 종식과 함께 권력의 민정이양이 추진된 이후 실시된 첫 번째 대선인데다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바뀌면서 전 국민이 투표에 참여했다.
박-윤 후보간 표차는 불과 15만여 표였다. 건국 이후 지금까지 치른 대선 가운데 가장 적은 표차의 선거였다. 선거전도 치열했고, 당선을 확정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승패 향방을 개표 이후 하루가 온전히 지나도록 파악하기가 어려웠고 당선자는 이틀이 지난 후에야 윤곽을 드러냈다.
대선의 지역별 득표수를 보면 요즘처럼 지역색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은 또 다른 특징이다. 당시 박정희 당선자는 수도권에서 밀렸지만 영남 뿐 아니라 호남에서도 30만여 표 차로 압승을 거뒀다. 호남에서의 득표가 당선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가 당선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혁신' 코드도 한 몫 했다. 결과적으로 '보수', '독재'가 박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단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혁신'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대선에서 그는 명문집안 출신에 정치경험이 풍부한 윤 후보와 맞붙은 신출내기 정치인이었다. 그만큼 매사에 적극적이고 남다른 시각을 가져야 했다.
그의 혁신 이미지는 5대 대선을 이틀 앞두고 실시한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잘 나타났다. 대선공약으로 자신있게 제시한 경제개발계획에 외신기자가 "불가능한 도전 아니냐"고 묻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면 못할 게 없다. 나부터 노력할 것"이라고 의욕을 불태우기도 했다.
정치의 목적이 세상을 바꾸는 데 있다면 혁신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1948년 정부수립 이전 온갖 정치단체가 난립하던 시기에도 '정치혁신'이라는 용어는 쓰였다.
민주화 이후 혁신은 정치권의 단골 단어가 됐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총재는 조순 민주당 총재와 합당을 선언하면서 '"김시대를 종식하고 정치혁신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시절 혁신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어 주변에서 "혁신 독서법이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최근 정치권에서 '혁신' 바람이 다시 한번 불고 있다. 새누리당은 6ㆍ4 지방선거를 앞두고 '혁신작렬'이라는 구호를 선보인 데 이어 공천 개혁 등의 임무를 띤 보수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새정치민주연합은 7ㆍ30 재보궐선거에서 패하자마자 꾸린 비상대책위원회 명칭을 '국민공감혁신위원회'로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여야 모두 삐걱대고 있다. 여당 보수혁신위는 혁신의 주체와 위원 선정 등을 놓고 친박과 비박간 갈등을 빚고 있으며 야당의 국민공감혁신위는 출범 한달도 안돼 좌초됐다.
혁신이 '낡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그냥 일상적인 용어로 격하된 지 오래다. 늘 '혁신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중요한 의미를 곱씹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단어든 물건이든 가치는 희귀할 때 빛을 발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는 요즘이다.
최일권 기자 ig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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