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2013년 2월11일, 천주교 역사상 600여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희귀한 일이 벌어졌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415년 교황 그레고리 6세가 성직 매매, 교회의 타락 등을 이유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해 강제 퇴임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한 달 후인 3월13일 콘클라베 둘째 날 아르헨티나 출신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자 전 세계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며 아메리카 출신 첫 교황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게다가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이 처음으로 등장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새 교황은 관례에 따라 천주교회가 선정한 성인들의 이름을 선택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선택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성(聖) '프란치스코' 누구인가= 왜 프란치스코 교황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했을까. 성인 '프란치스코'는 800여년 전, 이탈리아 중심 도시 중 하나인 아시시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불린다. 그가 죽은 지 2년 뒤인 1288년 카톨릭 성인으로, 300년 뒤 성공회 교회에서도 성인으로 추대됐다. 다시 1939년 이탈리아 수호성인으로, 1980년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이 됐다. 미국의 타임은 ‘지난 1000년 사이에 살았던 가장 중요한 인물 10인’으로 꼽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을 일삼고, 명예를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깨달음을 얻은 이후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가난한 이가 돼 세상에 버림받고 병들고 힘없는 이들을 돌봤다. 심지어는 나병환자들조차 서슴없이 어루만지고 껴안았다. 또한 허물어져가는 성당을 홀로 복구하고, 글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설교를 했다. 그때까지 성직자와 귀족들만이 라틴어로 이뤄진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아무 대가 없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도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때론 새와 동물들을 찬양하고 축복의 기도를 올렸다. '사도신경' 첫 문장인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는 대목을 철저히 신념화시킨 까닭이다. 그런 연유로 인간과 자연, 세계를 이루는 모든 만물을 존중하며 길가의 돌멩이 하나 함부로 차지 않았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서 재산을 훔친 셈이며 그들의 삶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처럼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서 재산을 훔친 셈이 되는 것이며, 그들의 삶을 빼앗는 것"이라고 설파하고 실천했다. 제자들에게도 “그날 먹을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미리 구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8년 예수회에 입회, 1967~70년 산미겔의 성요셉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69년 사제로 서품됐다. 1973~79년 예수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교구장 대주교, 1998년 대교구장, 2001년 추기경 등을 거쳤으며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선출하는 콘클라베에 참석했다. 2013년 2월11일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직을 사임한 후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3월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자 1202년 만의 비유럽권 출신의 교황이다. 그는 전형적인 아르헨티나 사람답게 탱고를 좋아하고 축구에 열광하기로 유명하다.
지난 7월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축구 결승에 오르자 세계인들은 교황이 고국을 응원할 것인지에 대해 자못 궁금해 했다. 이에 바티칸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 여부는 교황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며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을 정도다.
그가 아르헨티나 교회를 이끌었던 무렵은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끔찍하고도 잔인한 전쟁이 벌어지던 때다. 수만명이 공산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정식재판도 없이 납치, 암살되고 비행기에 실려가 바다에 던져졌다.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자녀는 군인들에 의해 키워지거나 먼 나라로 보내지기도 했다. 해방신학을 따르는 사제와 신도들 중에는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호르헤 신부는 "폭력의 대가는 항상 가장 약한 사람에 의해 지불된다"며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희생을 줄이는 노력을 기울였다.
호르헤 신부는 다른 신부들과 더불어 비밀경찰로부터 쫒기는 이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대주교, 추기경이 오른 이후에도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며 평범한 시민들과 마주쳤고, 늘 가난한 이들이 사는 곳을 찾아다니며 어울렸다. 어느 때는 직접 요리한 음식 바구니를 들고 빈민촌을 찾았다. 그 또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에이즈 병동을 찾아 병자의 발을 씻기고 입을 맞췄다. 화재 현장에는 소방당국의 구호차보다 먼저 도착해 사람들을 구했다. 그는 대교구장 시절 슬럼가를 주재하는 신부의 숫자를 두 배로 늘리고 빈민을 위한 신부 조직을 별도로 창설하는 등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을 일관해 왔다.
또한 호르헤 신부는 동성 결혼, 피임, 낙태 등 과학, 종교, 법, 관습에 뒤얽혀 오랜 시간 방치된 주제에 대해 논쟁하거나 단죄하기보다는 포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재산)’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다른 이들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있다는 성 프란치스코의 실천을 그대로 따랐다. 이에 청빈한 삶의 정신이 수백여년 후 성인 프란치스코와 교황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있다.
◆교황의 행보= 취임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취임 직후 바티칸 금융감독기구인 금융정보국(AIF)의 이사를 전원 해임하고, 성직자 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교황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물질만능에 물들어가는 세속을 질타해 세계인들의 감명을 이끌어냈다.
"뉴스에 주가 지수가 2포인트 떨어졌다는 소식은 나오지만 늙고 가난한 사람이 노숙을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음식이 버려지는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배제의 사회이며 불평등의 사회입니다. 오늘날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지배되고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돈은 봉사의 수단이지, 지배자가 돼서는 결코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일례로 작년 10월3일 이탈리아 시칠리아 람페두사섬 앞 바다에서 난민선 조난으로 500여명이 수장된 것과 관련,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끄러운 비극'이라며 "돈이 우리 자신과 사회의 주인이 되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지 말라"고 호소했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때에도 교황은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슬픔을 나눴다. 또한 교황은 세상의 불의와 악에 당당히 맞설 것을 주문한다. 이에 교황의 메시지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해 온 교황의 행보와도 일치한다. 더불어 교황은 노인, 어린이, 여자 등 약자들과도 평화롭고 진솔한 대화와 소통을 즐긴다.
신학자인 제병영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인, 가정, 교회, 사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인간 존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화합과 통합을 통해 희망찬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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