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금융 사기, 집단소송 맡은 이준길 변호사
[아시아경제 조은임 기자] '보안카드 35자리 전체 입력금지.' 요즘 온라인·모바일 뱅킹 첫 화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시지다. 보안카드 번호를 빼내 돈을 이체해가는 '파밍'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부터다. 고객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이 메시지 이면에서는 하루에도 수십건 일어나는 전자금융 사고를 두고 책임 공방을 벌이는 고객과 은행이 있다. 과연 보안카드 번호 유출로 일어난 사고는 누구의 책임일까.
지난 11일 서울 광화문 인근 선경 법률사무소에 만난 이준길 변호사는 단호히 '은행'을 지목한다. "전자금융서비스를 도입한 건 은행들입니다. 애초에 정보유출 위험성이 있는 이 서비스를 도입하면서 은행은 엄청난 비용을 절약하고 있죠. 그러면서도 이상거래 탐지나 모니터링에는 소홀했다면 이를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변호사는 국내에 몇 안되는 전자금융사기 전담 변호사다. 그가 집단소송 변호를 맡고 있는 피해자 수만 350명. 그가 한 포털에서 운영중인 카페 '보이스피싱 금융피해자 모임'은 개설한지 채 3년도 안 됐지만 가입자 수가 7000명에 육박한다.
보이스피싱은 이제 개그소재로 이용될 만큼 흔해졌지만 적게는 수 백 만원, 많게는 수억원씩 피해를 본 이들은 매일매일 양산되고 있다. 보이스피싱은 지난 6년간 국내에서만 5만건이 일어났고, 그 피해액은 5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보이스피싱은 물론 파밍, 스미싱 등 전자금융 사기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2006년에 제정된 '전자금융거래법'에 기대어 은행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뿐이다. 법은 금융거래 정보 유출 행위가 '중대한 과실'로 행해졌을 경우에만 개인에게 책임을 묻게 돼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중대한 과실'은 주로 은행들이 책임을 면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보안카드 번호 35자리를 모두 알려준 것은 '중대한 과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이 '중대한 과실'을 두고 은행측과 치열한 법리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가 은행의 책임을 묻는 논리는 이렇다. 우선 은행들이 보안카드 번호의 중요성을 고지한 것은 사후의 조치로 계좌를 개설할 당시에는 '합리적인 주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이 변호사는 "전문가들도 구분하기 힘든 가짜 사이트에서 보안강화나 업데이트 등 그럴듯한 이유를 들었기 때문에 번호를 내줄 수 있는 것"이라며 "'중대한 과실'은 쉽게 사기를 당할 것을 알면서도 유출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적용될 수가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창구에서 철저히 보안카드번호의 중요성을 고객에게 고지하고 있다.
이상거래를 탐지하는 모니터링에 소홀했다는 것도 은행 측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미 은행들은 내부적으로 이상거래를 탐지하는 시스템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심각한 위험이 있다고 판정되는 경우에도 차단이 되지 않아 피해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 변호사가 맡은 사건 중에는 위험등급을 '심각'이라고 평가했음에도 이체가 가능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는 "금융사들은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을 2006년부터 인지해 왔다는 판례가 있다"면서 "결국에는 모니터링에 들어가는 비용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가 이처럼 전자금융 사기에 매진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2012년 보이스피싱으로 5000만원을 탈취당한 지인의 변호를 맡으면서부터다. 미국변호사로 현지 금융기관에서 10여년 넘게 근무해온 그는 당시 사건 처리과정에서 본 국내 은행들의 무책임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98년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의 전문위원으로 4년간 활동하면서 국내 금융관련 법안 제정에도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전자금융사기 피해자는 단돈 50달러만 부담하면 피해액의 100%를 모두 은행들로부터 배상받을 수 있다"며 "전자금융도, 전자금융거래법도 모두 미국에서 들여온 것인데 유독 판례를 못들여올 이유가 전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때문에 그는 외국계 은행들을 대상으로 전략적인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다. SC은행, 씨티은행 등 글로벌 뱅크의 경우 미국에서는 전자금융 사기에 대해서 100% 고객에 배상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중국발 금융사기에도 유독 한국에서만 고객에 '중대한 과실'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가 한 외국계 은행을 대상으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법원은 지난 7일 합의 조정을 결정했다.
이 변호사는 언젠가 국내 은행들도 이같은 전자금융 사기에 대해 100% 배상을 하게 될 날이 올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이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조건 승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자신했다.
조은임 기자 goodn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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