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처럼 온 국민이 금융산업을 바라보며 얼굴 찌푸리고 앙앙불락한 적이 있었을까. 아마도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당시 치솟는 대출금리로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날려야 했고 등떠밀려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렸던 때도 금융보다는 정치적 위기 상황을 탓했다. 금융산업도, 그 종사자들도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정체성에 흠결이 가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올 들어 1분기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1억여건의 정보유출에 KT ENS 사기대출, 일본 도쿄지점 부당대출 등 국민들의 공분을 살 일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들 사고 모두 '사상 최대' 또는 '초유'라는 부끄러운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급기야 금융감독당국 직원까지 사기대출에 연루됐다. 또 팔리지 않았다는 1억여건의 개인정보는 이리저리 흩날려 대출업자 등의 '빅데이터' 역할을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금융은 신뢰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식상하지만 진실이다. 최소한 개발도상국 수준에서는 깨지면 안되는 불문율이다. 하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한국 금융이라면 신뢰를 넘어 '감동'을 줘야 한다. 감동을 주지 못하고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금융사라면 본질적 가치를 자문해봐야 한다.
사람들은 물건 사는 것을 구매행위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 상품을 고르면서 구매자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로 착각(?)한다. 이 착각이 바로 명품에 대한 집착을 낳기도 한다.
금융거래에서 소비자들의 마음은 상품구매 인식을 초월한다. 자신의 정보와 자산을 온전히 맡기며 은행이, 카드사가 나를 위해 일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을 때 감독당국이 지도해주리라 기대한다. 그 믿음과 기대가 소소하게라도 일어날 때 소비자들은 감동을 받는다. 이 수준을 넘어서면 고객은 행복해진다.
그동안 우리나라 금융사들은 금융위기 이후 리스크 관리에 상당한 관심을 쏟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하지만 돈을 잃지 않기 위한 리스크 관리에 집중한 것이 사달을 일으켰다.
금융산업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진짜 리스크에는 눈을 감았다. 아니 상상을 하지 못했다. 개인정보유출과 각종 사기ㆍ부당대출 사건은 시스템에 대한 투자로 100% 막을 수 없다. 인간의 양심과 도덕성에 대한 무감각증은 금융산업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리스크를 간과했다. 금융저널리스트인 안나 버나섹은 저서 '도덕성의 경제'에서 도덕성이 경제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어 부를 창출한다고 결론지었다.
한국의 금융산업은 '뱅스터'시대로 회귀할 참이다. 뱅스터는 1930년대 대공황시절 시민들이 분노에 휩싸여 뱅크(bank)와 갱스터(gangster)를 합성해 만들어 낸 조어다.
지금 전 세계 금융산업 규모는 뱅스터라고 금융을 평가절하하고 버릴 수 없는 수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국 포브스 400대 부자를 보면 4분의 1 정도가 투자와 헤지펀드, 보험 등 직접 금융과 관련돼 있다. 하지만 금융 외 비즈니스로 부를 창출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금융과 연결돼 있다. 앞으로도 역시 부의 창출과정에서 금융의 역할을 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금융산업은 자칫 '크레오소트 부시'로도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사막에서 자라는 이 나무는 주변 토양을 독성으로 오염시켜 다른 식물을 자라지 못하게 한다. 금융산업이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주변 연관산업의 성장은 더뎌질 수밖에 없다.
미식 축구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 '성모마리아 패스'라는 게 있다. 마지막 쿼터에서 가능성이 낮음에도 '성모마리아'를 외치며 마지막 승부수로 공을 던졌다고 해서 유래된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금융사들이 일제히 '성모마리아 패스'를 할 때다. 금융소비자의 응어리진 배신감을 달랠 수 있는 진정어린 사과와 함께 신뢰회복을 위한 감동 프로젝트에 나서야 한다. 성공여부를 따지지 말고.
박성호 금융부장 vicman120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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