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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비장함을 내려놓아야 할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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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비장함을 내려놓아야 할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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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글을 쓰는 일이 적잖은 편인 필자는 문득 언젠가부터 눈에 띄게 많아진 표현들이 있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곤 한다. '~한 듯하다' '~인 듯하다'는 표현들이다. '~이다' '~ 아니다'라고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대신 이렇게 흐릿한 언어를 쓰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인데, 그만큼 나 자신이 점점 자신 없어지고 명쾌하지 못하게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뭔가에 대한 의견이나 태도를 물어보는 말에 예전에 비해 모호하게 말하는 것도 나이 들면서 굳어진 습관이다. 예컨대 '너는 진보인가 보수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예전에는 어느 한 쪽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진보라기보다는 '진보적인 면이 있다'로, 어떤 경우는 보수라기보다는 '보수적인 면이 있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종교에 대해서도 이런 식이어서 가톨릭 신자라기보다는 다만 '가톨릭적'이라고 할 뿐이다.

반면 내가 쓰려고 하지 않는 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요즘 많이 들을 수 있는 '단언컨대'라는 말이다. '~것 같아요'라는 말이 남발되는 요즘의 언어습관에 대한 반격처럼 이 말이 유행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뭔가에 대해 단언을 내리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세대로서 명쾌하게 설명해야 만족해하며 청장년기를 보내왔던 내가 그만큼 지력이 퇴화한 것인지, 의지가 박약해져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세상을 좀 더 알아갈수록 어떤 일이건 어떤 사물이건 일면이 아닌 양면, 양면뿐만이 아닌 3면, 5면, 10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 다면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한참 못 미치니 어떻게 쉽게 단언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 같은 소심증이 가져다 주는 좋은 점도 있다.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과 단정은 겉으로 결연함과 비장함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몸에 과도한 긴장을 가져오게 되는데, 확신과 단정이 덜하니 몸이 조금이나마 더 가벼워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모호함과 소심증이 우리 사회에 좀 더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대담한 생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이야 이렇게 기우뚱하든 저렇게 기우뚱하든 대수로울 게 뭐 있으랴, 싶지만 확신과 단정이 좀 덜했으면 하는 이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확고한 인식과 신념이 권력의 행사로써 나타나는 이들이다.

'간첩증거 조작 사건'을 보면서 검찰에 드는 생각이 바로 그렇다. 사건의 전개과정을 보면 검찰은 상당한 책임을 피할 수 없어 보이지만 검찰은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 말을 믿고 싶다.


다만 검찰이 피해자인 것은 국정원으로부터 입은 피해 탓이 아니라 실은 검찰 자신의 자기확신과 비장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과거 많은 사건들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오직 우리만이 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도한 사명감과 결연함이 스스로를 피해자 아닌 피해자로 만든 것이다. 기소독점과 함께 애국심까지 독점하려는 그 비장한 사명감이 결국 검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든 것이다.


최근 최고 권력자의 말도 이런 점에서 염려가 된다. "규제는 우리의 '원수'다." 그 이전에 "진돗개처럼 꽉 물고 놓지 말라"고 한 발언은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말로 주목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이 말에 대해 대통령의 언어로서의 적절성에 대해 지적을 하는 듯한데, 내가 그보다 염려됐던 것은 이런 류의 언어 속에 박 대통령이 생각하는 정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당 부분 보여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는 적을 정복하고 격퇴, 섬멸하는 게 아니다. 흑 속에 백이 있고, 백 속에 흑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 양쪽을 껴안는 것일 듯하다. 진돗개 정신으로 원수를 공격하는 '돌격 지시'로는 안 되는 것일 듯하다. 비장함을 좀 내려놓기를. 그것이 그 자신의 건강은 물론 이 사회의 건강, 나라의 건강에 좋을 듯하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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