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배고픈 세상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더욱 고달프고 애처롭다. 이들에게 누군가 다가와 "용기를 잃지 말라"며 손을 잡아 준다. 그러면서 성현의 위대한 말씀과 지혜를 안긴다. 참으로 훈훈한 미담이다. 인문학자들은 속삭인다. "노숙자들이 인문학 강좌를 듣고는 감동에 겨워 눈물 흘리며 자활 의지를 떨쳤다." 놀랍고도 벅찬 말이다. '인문학 강좌 하나로 잉여들의 새로운 각성과 결의를 이끌어 내다니…. 주린 배를 채워준, 위대한 마음의 양식이여.' 유사 이래 이처럼 아름다운 구휼이 있었던가.
"인문학이 저를 살렸습니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제 제게 정작 중요한 건 밥이 아니라 인문학이란 걸 알았습니다."
재소자들마저 감격해 하는 풍경은 전혀 낯설지 않다. 여기저기서 간증이 이어지고 갱생의 길을 찾았다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백화점, 구청, 교도소, 도서관, 노숙인센터, 커피전문점 등 도처에 널린 인문학 배급소는 신흥종교의 부흥회장처럼 보일 지경이다. 참으로 호들갑스럽고도 슬픈 자화상이다.
지금 인문학 운동은 노숙인에서부터 자활 참여자, 재소자, 여성 주부, 노인, 미혼모, 탈학교 청소년 등 대다수 세상의 '잉여'들을 대상으로 한다. 반면 부자나 힘 있는 자들을 위한 인문학은 보이지 않는다. 잉여들의 밥상에만 밥 대신 인문학이 가득하다. 그야말로 잉여들이 인문학을 배부를 만큼 맘껏 누리는 시절이 됐다.
'한손에 인문학을, 또 한손에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정부와 학자들이 이때다 싶어 블록버스터 한 편 만들 듯, 인문학 운동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인문ㆍ정신문화과를 신설하는 등 인문학 진흥정책을 주도하러 나섰다. 각종 유휴시설을 활용,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일상 속 인문학' 확산을 꾀한다며 난리법석이다. 인문ㆍ정신문화진흥법도 제정할 태세다. 인문학이 국가 이념인 듯, 최고 통치자도 언급하기 일쑤다.
학자들도 강단 밖으로 뛰쳐 나와 인문학 협동조합, 인문학 아카데미, 인문학 연구공동체 등 다양한 깃발을 쳐들었다.국민들을 조직화하고, 가능한 공간을 징발하고, 여기저기 인문학 거점을 만드느라 혈안이다. 국민의 정신과 사회 질서를 재배치하려는 꼴이다. 그래서 인문학자와 인문학 공간의 네트워크는 점차 확산 일로다. 이미 권력과 학문이 결탁했다. 이들은 한통속으로 여타 지식과의 균형을 속속 무너뜨리고 있다. 여기서 단언컨데 인문학 운동의 최대 수혜자는 기난한 이들이 아니라 '인문학 장사꾼'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윤 창출을 구가한다. 인문학이 낡은 유물로 박물관 구석에 쑤셔박힌다 하더라도 안락함을 누릴 자들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본령은 간데 없다.
국가의 개입, 학계의 지나친 관심, 학문의 편중이 오히려 다 나은 삶을 위한 각성,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가는 상호부조의 믿음, 연대와 소통, 합리적 경제활동 등 우리 정신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국가 주도의 정신 운동이 항상 실패로 끝났다는 것은 사례를 일일이 꼽지 않더라도 역사가 검증한다. 이는 국가와 학자들의 일사분란한 개입에는 어떤 치명적 결함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한다. 인문학을 거부해서도, 중요함을 몰라서 우려해서도 아니다. 광풍이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너뜨리지 않는지 걱정스러워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운동이 여러 지식공동체의 기획, 시대적 요구,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넘실댄다면 누가 어깃장을 놓겠는가?
그래서 진정한 인문학 세상이 도래하고 국민이 더 행복해진다면 참으로 춤추고 반길 일이다. 다같이 웃고 즐기는 인문학, 제대로 시장을 경유한 인문학, 삶의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는 인문학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할 따름이다.
이규성 사회문화부 선임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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