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24)가 4일과 5일 고양 어울림누리 얼음마루 빙상장에서 열린 코리아 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14 겸 제68회 전국남녀종합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올림픽 2연속 금메달을 예감하게 하는 화려한 연기를 펼쳤다. 제22회 소치(러시아) 동계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다음달 8일 오전 1시 14분(이하 한국 시각) 개막식이 열리니까 오는 9일 새벽이면 D-30이다. 소치 대회가 열리는 올해는 한국인이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지 78년이 되는 해다. 많은 이들이 밴쿠버(캐나다) 대회의 감동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80여년에 이르는 한국 동계 올림픽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사를.
1896년 아테네에서 시작된 근대 올림픽 초창기에 피겨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등 일부 동계 종목은 하계 대회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동계 종목이 따로 살림을 차려 독립한 건 1924년의 일이다. 프랑스올림픽위원회 주관으로 그해 1월 26일부터 2월 6일까지 샤모니(프랑스)에서 국제동계스포츠주간(International Winter Sports Weeks)이 열렸다. 제8회 파리 하계 올림픽 사전 행사 성격의 대회로 16개국 258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이 대회는 2년 뒤인 1926년 리스본(포르투갈)에서 열린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제 1회 동계 올림픽으로 추인됐다. 동계 올림픽은 이때부터 1992년 알베르빌(프랑스) 대회까지 하계 대회와 같은 해에 열리다가 IOC의 동·하계 대회 순차 개최 방침에 따라 1994년 릴레함메르(노르웨이) 대회부터 하계 올림픽이 열리지 않는 짝수 해에 개최되고 있다.
한국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독일) 대회에 ‘조선인’ 선수 3명이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2010년 밴쿠버 대회까지 16차례 대회에서 금메달 23개, 은메달 14개, 동메달 8개를 거둬들였다.
일본이 동계올림픽에 얼굴을 내민 건 1928년 생모리츠(스위스) 대회다. 크로스컨트리 스키, 노르딕복합, 스키점프 등에 6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1932년 레이크플래시드(미국) 대회에는 크로스컨트리 스키, 피겨스케이팅, 스피드스케이팅 등에 16명이 출전했고,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대회에는 알파인 스키, 크로스컨트리 스키, 피겨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스피드스케이팅 등에 31명의 선수가 나섰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스피드스케이팅에 ‘리[李] 세이도쿠’ ‘긴[金] 세이엔’ ‘조[張] 유소쿠’ 등 한국인 성(姓)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이성덕, 김정연, 장우식으로 일장기를 달긴 했지만 엄연한 한국 선수였다. 1930년대에 열린 각종 스피드스케이팅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은 일본 선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경기여서 일본체육협회는 뛰어난 기록을 자랑하는 한국 선수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36명이 출전한 500m에서 이성덕은 45초0으로 12위를 했고, 37명이 참가한 1500m에선 김정연이 2분25초0의 일본 신기록을 세우며 15위로 골인했다. 이성덕은 이 종목에서 2분28초9로 23위를 했다. 39명이 나온 5000m에서 김정연은 8분55초9로 21위, 이성덕은 9분8초0으로 27위 그리고 장우식은 9분8초7로 28위를 했다. 일본인 4명 등 7명의 일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단 가운데 '빙판 위의 마라톤’으로 불리는 1만m에는 ‘조선인’ 선수 3명만 출전했다. 30명의 선수 가운데 김정연은 18분2초8의 올림픽 신기록이자 일본 신기록을 마크하면서 13위로 들어왔다. 이성덕과 장우식은 각각 25위와 26위였다. 한강이 제대로 얼지 않아 대회를 열지 못하는 등 열악한 경기장 시설과 국제 대회 출전 경험 부족 등 악조건 속에서도 중위권에 들었다는 것은 한국 동계 올림픽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대한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8년 2월 생모리츠(스위스)에서 열린 제5회 동계 올림픽에 최용진, 이효창, 이종국 등 3명의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선수를 파견했다. 대회에서 최용진은 500m 공동 21위와 1500m 31위, 이종국은 1500m 공동 36위와 5000m 38위, 이효창은 500m 공동 23위와 1500m 19위, 5000m 25위를 기록했다. 이 대회 500m에 42명, 1500m에 45명, 5000m에 40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니 아주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1952년 오슬로(노르웨이) 대회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참가하지 못했다. 1960년 스쿼밸리(미국) 대회에서는 스키(크로스컨트리·알파인)에 첫 발을 내딛었고,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김경회, 한혜자 두 여자 선수가 첫선을 보였다. 1968년 그르노블(프랑스) 대회에선 피겨스케이팅에 처음 출전한 남자 싱글 이광영이 28명의 선수 가운데 꼴찌를 했다. 여자 싱글의 이현주와 김혜경도 각각 30위와 31위(최하위)에 그쳤다. 1984년 사라예보(옛 유고슬라비아) 대회에는 바이애슬론이 처음으로 출전했다.
1988년 캘거리(캐나다) 대회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배기태가 500m 5위와 1000m 9위를 차지하면서 메달권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시범 종목으로 열린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에선 김기훈이 남자 1500m 1위, 이준호가 남자 3000m 1위를 차지하면서 쇼트트랙 강국 한국의 등장을 예고했다.
1936년 대회 이후 50년이 넘도록 ‘노 메달'에 머문 한국은 쇼트트랙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알베르빌 대회 1000m에서 김기훈이 드디어 동계 올림픽 ‘1호 금메달’을 획득했다. 김기훈은 이준호, 모지수, 송재근과 함께 출전한 5000m 릴레이에서 한국이 우승하는 데 견인차 구실을 해 4년 전 서울 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한 김수녕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올림픽 2관왕이 됐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김윤만이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은메달을 차지해 동계 올림픽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김윤만은 금메달리스트인 독일의 올라프 징케에게 불과 0.01초 뒤진 1분45초85를 기록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대회에서 한국은 2관왕 전이경(여자 1000m 3000m 릴레이) 등 쇼트트랙의 강세에 힘입어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알베르빌 대회 종합 순위 10위에서 6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모든 메달이 쇼트트랙에서만 나왔지만 동계 올림픽 개최 경험이 있는 캐나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일본 등 세계적인 동계 스포츠 강국들을 제쳤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1998년 나가노(일본) 대회에서 한국은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따 종합 순위 9위로 1992년 알베르빌 대회 뒤 3회 연속 ‘톱 10’에 들었다. 김동성과 전이경이 남녀 1000m에서 나란히 금메달 레이스를 펼쳤고, 여자 3000m 릴레이에서 금메달을 보탰다. 전이경은 5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차지하는 맹활약 속에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과 2개 종목 2연속 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4회 연속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나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미국) 대회에서는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로 종합 순위 14위에 머물렀다. 쇼트트랙 의존도가 여전한 가운데 남자의 부진이 두드러졌다. 남자 쇼트트랙은 알베르빌 대회와 릴레함메르 대회에서 각각 2개, 나가노 대회에서 1개의 금메달을 따 한국의 종합 10위 진입에 견인차가 됐지만, 솔트레이크시티 대회에서는 단 한 개의 메달도 건지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는 16살의 중학교 3학년 고기현이 1500m에서 우승했고, 3000m 릴레이에서 최은경과 박혜원, 주민진, 최민경이 완벽한 팀플레이를 펼치며 릴레함메르 대회와 나가노 대회에 이어 3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2006년 토리노(이탈리아)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로 종합 순위 10위에 오르는 한편 안현수와 진선유 두 명의 3관왕을 배출했다. 안현수는 쇼트트랙 남자 1000m, 1500m, 5000m에서, 진선유는 여자 1000m, 1500m, 3000m 릴레이에서 각각 금빛 질주를 했다. 이강석이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목에 건 동메달은 1992년 알베르빌 대회 남자 1000m 김윤만의 은메달 뒤 14년 만에 나온 소중한 메달이었다.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선 17살의 이상화가 4년 뒤 호성적을 예고했다. 금메달리스트인 스베틀라나 주로바(러시아)에게 1, 2차 레이스 합계 0.47초 뒤져 5위에 올랐다.
2010년 밴쿠버 대회에서 한국은 쇼트트랙 편중에서 벗어나며 동계 올림픽 강국으로서 손색없는 성적을 올렸다.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의 김연아,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세계 최고의 남녀 스프린터가 된 모태범과 이상화, 1만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한 이승훈 그리고 쇼트트랙 남자 1000m와 1500m의 이정수가 나란히 금메달리스트가 되면서 한국의 동계 올림픽 역사를 새롭게 썼다.
김연아는 2009-2010시즌 그랑프리 시리즈 파이널(도쿄),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로스앤젤레스) 등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각종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며 일찌감치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이정수는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는 한국 쇼트트랙의 경기력을 고려할 때 금메달이 어느 정도 예견됐다.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 등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이 획득한 금메달은 또 다른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쾌거였다. 모태범과 이상화의 남녀 500m 금메달은 1924년 제1회 동계 올림픽 뒤 86년을 이어 오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없었던 이 종목의 한 국가 남녀 동반 우승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었다. 이승훈의 금메달은 그가 7개월 전까지만 해도 쇼트트랙에서 활동했던 선수라는 점에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국은 이들 ‘빙판 오누이’들의 활약을 앞세워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 순위 5위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빙상 경기장이 없어 한강 또는 서울운동장 간이 링크, 건국대학교 일감호 등지에서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를 했던 한국 동계 스포츠. 최근의 선전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춘천 공지천에서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하는가 하면 창경궁 연못에서 아이스하키 경기를 하는 등 요즘 시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건에서 노력한 동계 종목 선배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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