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이 골짜기.... 오래 있어봤자 좋을 건 없지만.”
운학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더 없이 쓸쓸해졌다. 하림은 별 대꾸 없이 대추나무 우듬지 너머 하늘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지나가고, 이제 곧 본격적인 여름이 올 것이었다. 모든 것은 시간을 따라 흘러간다. 그 무엇도 그것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었다.
“나도.... 곧 여길 떠날거요.”
운학이 말했다. 하림은 처음에 잘못 들은 건가 했다. 흘낏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운학이 지레짐작을 하지 말라는 듯 얼른 말했다.
“그녀 때문은 아니오. 그녀가 떠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녀 때문은 아니오. 그냥 이곳이 싫어져서 그런 거라오. 내 고향이긴 하지만.....”
그리고나서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홀짝거리며 마셨다. 얼마 전 남경희가 왔을 때 했던 말과 똑 같았다. 하림은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묵묵히 시선을 발 밑에다 던지고는 그가 다시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장선생 눈에 내 꼴이 좀 우스웠을 거요. 아니 장선생 뿐만 아니라 사람들 눈에 내가 미친 놈처럼 보이기도 했을거요. 그녀는 처음부터 내게 어울리지 않았어. 나도 알아요. 그녀는 수관 선생을 좋아했고, 그에게 침을 배우러 다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녀는 내게 탈출구였어요. 이 답답하고 막막한 골짜기에 어느 날 그녀가 나타났을 때, 잃어버린 꿈이랄까, 사라져가는 불길 같은 게 다시 내 가슴에 댕겨 오는 걸 느꼈지요. ”
하림은 눈길 끝에 놓인 그의 허전한 왼쪽 바지가랭이를 보았다. 그 속엔 발목 지뢰 땜에 달아난 다리 대신 의족이 달려 있을 것이었다.
“이 나이에 말이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아니, 이런 말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사실 난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어요. 그녀가 받아주든 않든 그건 별 문제가 아니었어요. 날마다 술만 퍼마시고 자학하며 살던 세월이었지만 그녀가 나타나고부터 내겐 삶의 목표 같은 게 생겼지요. 그녀의 관심을 사고 싶었고, 그녀랑 그럴 수만 있다면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싶었지요. 결혼을 한다만다 그런 건 상관이 없었어요. 그저 그녀 곁에서 그녀가 하는 일을 지켜볼 수만 있으면 만족이었어요. 설사 기도원이 아니라 불당이나 놀이터를 짓는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요.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여자.... 그런 사람, 만나기도 어렵지 않겠어요, 이 골짜기에서.... 아니,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말이오.”
그의 목소리가 조금 열기를 띄는 듯 했다. 하림은 남경희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 불던 밤, 저수지의 풍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꿈에 불과할 뿐이란 걸.... 나도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다시 쓸쓸하게 젖어들었다.
“며칠 전 그녀가 찾아왔고, 자기 아버지랑 이곳을 영영 떠나겠다고 하더군요. 자기는 더 이상 송사장 무리와 맞설 힘도 없거니와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고마웠다고..... 난 그녀의 심정을 백분 이해하였죠. 그녀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 지경이선 그럴 수 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나서 그는 자기 컵에다 스스로 막걸리를 따랐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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