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보와 텔렉스, 삐삐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다면 요즘 청소년들은 "그게 뭐예요?" 하고 묻기 십상이다. 용도는 고사하고 무슨 단어인지조차도 모를 것이다. 50대가 넘는 중년에게나 '그래, 옛날에 그런 것들을 쓰기도 했었지' 하는 정도의 어슴푸레한 기억의 편린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교환원이 바꿔주던 전화에서 진화하기 시작한 전화 역시 집전화, 휴대전화를 거쳐 이제 스마트폰 세상으로 완벽하게 접어들었다. 나이 든 세대 입장에서 보면 휴대전화의 편리성에 놀라워하면서 간신히 여러 가지 용도나 사용방법에 적응할 만하니까 곧바로 스마트폰 세상이 열린 셈이니 기술진화의 속도에 울렁증이 날 만도 하다.
이런 가운데 한때 자타가 공인하던 휴대전화 시장의 글로벌 최강자 노키아가 마이크로소프트(MS)에 인수됐다는 뉴스는 정보기술(IT)업계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는지, 잠깐의 판단 착오가 얼마나 뼈아픈 몰락으로 이어지는지를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사례다. 노키아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 기존의 통신방식을 완전히 바꿔버린 스마트폰에 대해, 신기한 기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일부 테크족(tech族)의 전유물 정도가 될 것으로 오판했고 대응에 늦어 결국 몰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미래에 대해 노키아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국내에 아이폰이 들어와 휩쓸기 시작할 때까지 별 대응이 없었던 국내 기업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처음 캐치업(catch-up)에 다소 시간이 걸렸을 뿐 그 이후부터는 특유의 속도전으로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오히려 애플을 압도하는 국면으로 만들어간 힘은 대체 무엇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온다. 애플과 감정이 상한 구글이 삼성 등 한국 기업과 반(反)애플 진영을 구축했기 때문이라는 합종연횡론, 죽기 살기로 기술개발에 매달리고 따라잡았기 때문이라는 '한국 기업 근성론' 등등.
다 나름대로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애플이 연 스마트폰 세상에 곧바로 따라서 진입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기술적 기반과 지식을 우리나라 IT 생태계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눈이 뜨이고 판단 착오를 깨달았다고 해서 누구나 스마트폰의 새로운 세상으로 단숨에 방향을 전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 이처럼 단단한 IT 기술 생태계가 조성되고 기름진 토양이 형성된 것은 그 흙 속에 오랫동안 수많은 벤처기업의 '죽음'이 묻혔기 때문이다. 벤처기업은 비록 사라졌지만 그 기업이 남긴 기술은 차곡차곡 묻히고 분해되고 재조합되고 숙성되어 또 다른 기술로 진화해온 것이다. 다른 기술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새로운 기술의 한 부분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사무실에 간이침대 놓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기술개발에 매달리다 성공 직전 문턱에서 좌절하거나 자금 부족으로 도산한, 많은 기술벤처기업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다른 기술로의 재탄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기술들이 풍요로운 토양으로 자리 잡아 필요할 때 필요한 상품을 빠른 속도로 개발해내는 지식과 자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부가 창조경제를 지원할 때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 가운데 하나는 벤처기업에 '실패할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뼈저린 실패를 경험하고 회사 문을 닫아 본 적이 있는 벤처기업인이라면 실패 그 자체가 경험이라는 자산으로 쌓이게 된다. 그들의 기술을 재평가하고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은 정부와 공공기관의 역할이다. 과거의 실패를 딛고 재기하려는 벤처기업인들을 잘 돕는다면 한국 경제의 차세대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토양이 저절로 형성될 것이다.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경제금융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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