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이후 급성장을 이룬 한국 스포츠. 이를 뒷받침했던 스포츠 시설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 3일 인천 선인체육관 양쪽에 있던 65m 높이의 강의동 건물 2채가 발파 공법으로 해체됐다. 앞서 지난 6월에는 강의동 건물 사이에 있던 체육관이 철거됐다. 이 지역에는 주택 단지와 근린공원이 들어선다. 스포츠팬들에게 프로복싱 세계타이틀매치로 기억되는 선인체육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1973년 9월 완공된 선인체육관은 형님뻘인 장충체육관보다 규모가 컸다. 400m 트랙도 설치할 수 있었다. 축구, 야구 등을 제외하면 어떤 종목의 경기도 치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홍수환, 장정구 등 1970, 80년대를 주름잡은 프로복서들의 경기가 자주 열렸다. 겨울철에 중남미 선수들과의 경기가 열리면 체육관 창문을 모두 열어 우리나라 선수가 유리하도록 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이어져 오고 있다.
글쓴이는 선인체육관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11년 여름 인천체고에서 마련한 ‘(성)폭력 예방을 위한 교육’을 취재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 걸 그룹 애프터스쿨 멤버 유이의 모교인 인천체고는 선인체육관 안에 학교 시설을 두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전했지만. 선인체육관은 곳곳이 낡아 1970년대의 위용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2년 뒤 해체를 앞두고도 묵묵히 옛 영광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많은 스포츠 애호가들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을 여전히 추억한다. 야구, 축구 팬들이 1970년대 고교 야구대회와 박스컵 축구대회를 회상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겠지만 두 경기장 사이로 걸어 들어가면 다이빙대를 갖춘 수영장이 있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 2관왕,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3관왕에 빛나는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가 서울 은석초등학교 때 언니 윤정과 헤엄을 치던 곳이다. 수영장 바로 옆에 있는 테니스 코트는 모래를 깔면 씨름장, 링을 설치하면 복싱장으로 변신했다.
조선 말기 훈련원에서 출발한 동대문운동장은 일제 강점기 경성운동장, 해방 이후 서울운동장을 거치면서 100년이 넘게 한국 스포츠와 영욕을 함께했다. 스포츠 올드 팬들이 동대문운동장을 흔적도 없이 밀어 버린 서울시를 원망하는 주된 이유다.
하나둘 스포츠 시설이 사라지는 가운데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스포츠 시설이 있다. 우리나라 실내 스포츠의 메카 장충체육관이다.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장충체육관은 올해 말이면 멋진 현대식 체육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곧바로 체육관으로 갈 수 있다고 하니 지하철역에서 내려 제법 걸어가야 하는 도쿄돔보다 훨씬 접근성이 좋을 수 있겠다.
장충체육관을 지붕이 있는 체육 시설의 원조로 보는 이들이 많지만 1960년대 이전에도 체육관은 존재했다. 우선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YMCA, 평양 숭실전문학교 등에 실내 코트가 있었다. 그러나 규격에 맞는 실내 코트가 없어 거의 대부분의 경기를 옥외 코트에서 치렀다. 여기서 경기는 농구를 말한다.
해방 이후 몇몇 학교가 체육관을 지었으나 역시 경기를 하기엔 미흡했다. 국제대회를 열 만한 관중석을 갖춘 정규 규격의 체육관은 1960년에 이르러 지어졌다. 연세대학교 체육관이다. 한국과 일본의 친선경기가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다. 연세대학교 체육관은 약간 손질만 했을 뿐 여전히 백양로 옆 그 자리에 있다.
장충체육관은 원래 그 자리에 옥외 코트가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들이 스모(일본 씨름) 경기장을 세우려고 확보해 놓은 터였다. 해방 이후 서울시의 협조로 그 자리에 옥외 코트가 들어섰고, 한국은행이 농구대를 기증했다. 이후 민간 차원에서 실내 코트 건설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뒤 옥외 코트이긴 하지만 마루가 깔리고 관중석이 설치된 경기장이 육군의 주도 아래 건립됐다. 요즘 ‘다시 보는 대한늬우스’에 이따금 등장하는 마루가 깔린 옥외 코트에서 펼쳐지는 농구 경기가 바로 이곳에서 열렸다. 극난(남자), 양우(여자) 등 자유중국(대만)팀 초청 국제 경기도 이곳에서 벌어졌다. 육군체육관이다. 지붕이 없는 옥외 경기장인데도 ‘집 관(館)’자가 들어간 체육관이라고 한 게 특이하다.
옥외 코트에서는 기량 향상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 나라의 경제력으로 볼 때 큰 규모의 체육관을 짓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어려운 여건에서 1960년 3월 서울시는 900여만 원의 예산으로 기공식을 한데 이어 공사비 9,200만 원을 투입해 1963년 2월 1일 국제적으로 손색이 없는 장충체육관을 완공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만든 효창구장 건설에 2억3천만 원이 들었으니 당시 체육관 건립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단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리모델링을 결정하기 전에 장충체육관을 이전해야 한단 의견이 일부에서 제기됐지만 서울시의 현명한 결정으로 선배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는 장충체육관은 제자리를 잃지 않게 됐다. 옛 것을 무조건 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란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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