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음악시장의 중심이라고 뻐기면서도 싸이의 말춤 정도도 수용하지 못해 안절부절이라니… 이제 너흰 끝났어 !"
지난해 'B급 문화'로 일컫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를 강타할 때 유일하게 '말춤'을 추지 않은 일본인에게 우리가 했던 말이다. 거꾸로 이 말이 맞다면 하루키 문학을 열광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우리가 아시아 문학시장의 중심이라는 반증이어야 한다. 그런가?
'출간 보름만에 30만부 판매 돌파!' '무라카미 하루키 신드롬'이다. 하지만 언론은 요란하고, 비평은 고요하다. 이미 하루키 열풍은 문학을 넘어 사회비평의 영역으로 진입한 상태다. 침묵하자니 직무 유기같고, 한마디 보태자니 하루키 열풍을 더욱 부채질하는 걸로 비춰질 지경이다.
어느 작가는 '젊은 애들이 하루키 하루키 하길래 한번 읽어 봤는데 소설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라며 화를 낸다. '몇 장 읽다가 같은 얘기를 되풀이하는 통에 덮어버렸다'는 평론가도 있다. 개 중에는 '우리도 하루키같은 작가를 갖고 싶다'며 소설의 엄숙함을 벗어 던지라고 주문하는 이도 있다. 고급 관료라면 반드시 '베를린 필 하모닉'의 내한공연 쯤은 봐주고, 점잖은 분위기에서는 클래식과 포도주를 좀 아는 체 하는 것처럼 하루키 소설 읽기를 지적 액서사리로 이해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비평의 영역에선 여전히 하루키 문학을 흥행에 성공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정도로 가볍게 치부한다. 작가들 또한 하루키가 세계적인 소설가라해도 열풍은 기형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출판컨설턴트도 당혹스럽다. 우리 출판시장은 산업 위기, 시장 몰락,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 정책 부재 등으로 우울한 판국이다. 게다가 선인세 16억원을 지른 대형 출판사의 '돈질', 즉 출혈 경쟁은 소설의 반짝 열풍에도 출판인들을 더욱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든다.
하루키 문학은 일본 출판시장의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낸 측면이 있다. 이번 하루키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지난 4월12일 0시를 기해 일제히 서점에 깔렸다. 0시에 앞서 일본 주요 서점 앞에는 책을 사려는 인파가 긴 줄을 이뤘다.
0시 판매는 일본 서점계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테크닉 중의 하나다. 일본 서점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전부 거대 출판사가 차지한다. 또한 그런 자리마다 유명작가의 이름표가 광채를 내뿜는다. 교보문고 통로 중간, 별도의 이동 진열대에 '신경숙' 소설 수백권 쌓여 있는 정도는 '새 발의 피'다. 일본의 서점들은 우리나라 서점과는 달리 힘이 막강하다. 출판사들은 서점의 주요 자리를 비싼 돈을 주고 사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베스트셀러와 인기 작가는 주요 유통 인프라를 확보한 출판사와 서점의 담합, '0시'라는 작위적인 상술, 철저한 기획력에 의해 곧잘 탄생한다. 이에 비하면 사람을 풀어 책 몇권 사재기하거나 파워블로그를 동원하는 한국적 출판 상술은 그저 애들 장난 수준이다. 일본의 베스트셀러는 어느 정도 상업주의, 담합, 독과점에 의한 착시가 작용한다.
그렇다고 하루키 문학을 출판 시장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몰아 세우기에는 우리에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거 ! 참 희한하네, 왜 열광하는거지 ?' 읊조리면서도 뒤로는 하루키 소설을 읽다가 내팽개치는 비평가의 이중성이 그것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하루키 문학의 평론을 내놓기보다는 독자의 리뷰나 들여다 보는 '눈팅족'으로 전락한 꼴이다.
하루키 문학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연구 대상임은 분명하다. 이 지점에서 비평가들은 하루키를 차치하고라도 문학의 대중성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내놓아야 옳다. 어느 자리든 비평가가 반드시 해야 할 몫이 있다. 외면은 비인문적이지 않는가 ? 꼭 말춤을 보는 일본인처럼.
이규성 사회문화부 선임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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