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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정희경의 '청도 시외버스 터미널 - 지슬리11'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7초

북향으로 돌아 앉아 그늘이 깊어진 곳/듬성듬성 이 빠진 벽면의 시간표 위/오늘도 늙은 버스가 덜컹이며 들어온다//모두가 지나가도 시간은 머물러서/빛바랜 소주 광고 속 그녀는 멈추었다//지슬행 차표를 산다/뒷모습 가벼운 날


■ 지슬리(池瑟里)란 이름에 마음이 끌려서, 인터넷에 그 이름을 쳐서 찾아본다. 금분태라는 분의 시를 만난다. '지슬리의 봄'이라는 시인데, 작은아이 낳고 몸 풀고 처음으로 대문 나가 보니 복사꽃, 목련이 모두 지고 말아 봄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던 날들을 전해 준다. 지슬리의 봄이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지 못한 봄을 노래하는 그 마음이 더욱 곱게 와 닿지 않는가. 정희경 또한 지슬리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청도 터미널에서 지슬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에서 시를 멈췄다. 지슬리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곳으로 가는 청도의 풍경만으로도 저절로 마음이 애잔해진다. 무뚝뚝하게 지은 늙은 터미널 건물은 북향인지라 그늘이 더 깊다. 벽에 붙은 버스시간표는 승객이 워낙 없어서인지 편수를 줄인 모양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늙은 인부처럼 쿨룩거리며 들어오는 버스가 이 노선의 사정을 말해 주는 듯하다. 시인은 쓸쓸한 풍경 속에서 벽에 붙은 소주 광고의 야한 모델을 무심코 들여다본다. 다들 훌쩍 떠나가 버렸는데 홀로 남은, 먼지 뒤집어쓴 여자의 웃음 한잔. 지슬리나 가볼까. 차표를 끊는 그 마음에는, 지슬리의 풍경이 이미 들어 있다. 큰 저수지 부근 마을이라 연못(池)이 거문고를 탄다(瑟)는 이름의 그곳. 물결을 떠미는 바람 소리를 이렇게 제목 뽑은 이름 없는 시인은 누구였을까.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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