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산마을 사람들 이야기 다룬 다큐 '춤추는 숲'.."마을에 사는 게 행복하다"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강석필 감독의 별명은 '맥가이버'이다. 맥가이버처럼 전지전능하게 무엇이든 뚝딱 고치고 싶어서 스스로 지은 별명이다. 강 감독은 "현실은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 나왔던 '순돌이 아빠' 수준"이라며 웃는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그에게 지나가던 동네 주민들이 인사한다. "맥가이버, 어디 가?", "맥가이버, 술이나 한 잔 할까?" 말을 건네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이름이 없다. 대신 토끼, 소녀, 깜장콩, 웅이, 짱가 등의 친근한 별명이 있을 뿐이다. 강 감독의 부인이자 영화 '춤추는 숲'을 같이 만든 홍형숙PD의 별명은 '호호아줌마'에서 따온 '호호'다. 이름 대신 서로의 별명을 불러주는 곳, 이곳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성미산 마을이다.
영화 '춤추는 숲'은 성미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각박한 도시 생활을 좀 '다르게' 살아보고자 모인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지 벌써 20년. 유쾌하고도 유별나게 행복한 이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자 했던 카메라는 2010년 홍익대 재단이 성미산 일대에 학교를 조성하는 계획을 세우면서 본의아니게 주민들의 '투쟁기'가 되고 만다. 성미산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은 온몸으로 나무를 껴안아 톱질을 막고, 아이들과 함께 비틀즈의 렛잇비를 개사한 '냅둬유' 노래를 합창한다. 이도 저도 안되자 주민 '쟁이'가 구의원을 뽑는 지자체 선거에 직접 출마도 한다. 그러나 결국 공사는 강행되고, 성미산 나무들은 뿌리가 뽑혔다. '쟁이' 역시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재독(在獨) 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이분법을 다룬 영화 '경계도시' 이후 강석필 감독의 선택은 예상 밖으로 '마을 공동체'다. 단순히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겠거니 싶지만 결국 교육과 생명, 연대와 행복에 관한 큰 밑그림을 그려준다. 그렇지만 성미산 주민들로서는 기억하기 싫은 기억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영화가 기억 한 켠에 묻어놓았던 고통스런 내용을 다시 들춰내는 거라서 보기 싫다는 주민도 있었다. 상영되자마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주민도 있었고. 근데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고 다같이 뒤풀이를 하고 나서는 표정이 밝아져있더라. 아마 이 영화를 통해 주민들이 그 당시의 감정을 정리하는 '씻김' 작업과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강 감독이 직접 전하는 에피소드는 짠하면서도 웃긴다. "성미산에서 공사가 재개되면서 텐트 농성을 하던 주민들이 다치게 됐다. 당연히 주민들은 분개하고, 그 새벽에 경찰까지 왔다갈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근데 나중에 주민 회의에서 그 상황을 설명하는 걸 듣자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와서 결국 편집하게 됐다. '굼벵이'가 공사 현장에서 맞아서 다치고 '낙지'가 놀라 달려가고, '토끼'가 경찰한테 상황을 설명했다고 하니 웃기지 않은가. 원래 별명은 공동육아하는 선생님들이 먼저 쓴 것이다.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스스로 별명을 붙여 부르게 했다. 나중에는 부모들까지 나서서 자신의 별명을 지어 불렀다. 확실히 별명으로 부르니 위계질서를 따지지 않게 되고 소통이 더 잘된다."
왜 주민들은 그토록 성미산을 지키려 했을까. 언뜻 보기에는 해발 66m의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 불과해 보인다. 환경부가 지정한 친환경 생물 서식공간 1등급지라는 환경적 가치와 학교 재단의 '사유재산권'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고 있을 때 영화는 13살 승혁이에게로 카메라를 돌린다. 잘려나간 나무들로 민둥하게 돼 버린 산에서 승혁이는 홀로 뿌리가 앙상하게 드러난 나무에 흙을 덮어준다. "생명에는 주인이 없어요. 학교를 만들려는 이 산에는 너무나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어요"라는 승혁이의 말과 함께 카메라는 촘촘하게 흙 위를 기어가는 개미떼의 모습을 비춘다. 강 감독은 "이 장면은 일부러 연출해서 찍은 거 아니냐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승혁이가 훨씬 더 어른스러운 말을 많이 해서 가장 아이다운 말로 골라넣은 거다"라고 설명한다.
"마을 주민들이 상처를 받은 것은 성미산이 파헤쳐졌다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부분도 있지만 심리적인 부분이 더 크다. 성미산은 아이들과 차곡차곡 추억을 쌓은 곳이고, 생활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장소다. 때문에 그 곳이 훼손됐다는 것은 마을이 추구하던 가치가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훼손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다쳐나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좌절감을 느끼게 된 게 아닐까."
그렇다고 성미산 마을 주민들이 외부인의 시선에서 보이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국정원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종북 좌파의 온상'은 더더욱 아니다. 강 감독은 "마을에 이념적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성향의 주민들이 있다. 단 하나 공통점은 '니 새끼 내 새끼 가릴 것없이 잘 키우고 행복하고 열심히 살자'는 마음뿐이다. 마을살이는 거의 10년이 다 돼가는데 이 마을에 사는 게 재밌다. 남들처럼 주식, 부동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내일은 어떤 재밌는 일을 해볼까'를 얘기한다"고 말했다.
'춤추는 숲'은 성미산마을 3부작 중 첫 편이다. 2부에서는 공동육아 1세대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가, 3부에서는 1세대 어른들의 이야기가 담긴다. 1편에 비해 2,3부는 훨씬 발칙하고 유쾌할 것이라고 한다. "공동육아 1세대 아이들이 벌써 청년이 다 되간다. 재벌, 운동가 등 아이들이 꾸는 꿈도 다양하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은 '내가 무엇을 하든 행복할 수 있다'는 자기 긍정과 자존감이 정말 크다. 다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넘쳐나는지 모르겠다"며 강 감독은 웃는다.
"최근에는 페이스북 친구를 맺은 동네 중3여자애가 쓴 글을 봤다. 학교가 일찍 끝났는데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수다 떨고, 붕어빵 사먹고, 노래 부르고, 구덩이 파서 물놀이 하고 그랬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아 햄볶하다(행복하다)'고 써놨더라. 대한민국 청소년 중에 누가 그렇게 비생산적인 일로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조급함 없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삶은 가능한가? 성미산 마을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조민서 기자 summer@
사진=최우창 smi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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