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며 노래하세/우리네 인생 살면 얼마나 산다고(단가행)/천리마는 늙어 마구간에 매여 있지만/마음은 천리를 치닫듯/열사 비록 몸은 늙었지만/큰 포부는 가시지 않네(보출하문행).
조조(曹操)가 남긴 시구의 일부다. 시인 조조.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다. 그러나 조조는 중국문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건안문학의 주역이다. 무제 조조와 그의 아들 문제 조비, 조식은 당대의 문인으로서 정치와 문학을 함께 아우른 삼국시대의 대표적 정치인이다.
조조는 높은 산에 오르면 반드시 시를 짓고(登高必賦), 전쟁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手不舍書). 소설가 루쉰은 조조의 시는 완고하고 편벽한 후한의 시풍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달한 패턴을 보여준다고 평가하고 있다. 북송의 소동파는 "술을 걸러 강가에 가고 창을 옆에 끼고 시를 읊었으니 일세 영웅이다"고 조조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구현하려는 의지가 치열하게 느껴진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큰 포부는 가시지 않네"라는 구절에서 시대의 혁명가 조조의 매서운 기상과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이상과 낭만이 흘러넘치고 굳센 도전 정신을 보여준다. '우리 인생 살면 얼마나 산다고'에서는 조조의 외로움과 회한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시 세계는 '고적하고 비량한 시풍'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조씨 부자와 공융, 진림 등 건안칠자(建安七子)는 건안문학을 창조했고 건안문학 집단을 융성케 하였다. 조조는 재능 있는 문인을 등용하고 적극 지원하고 건안풍골(建安風骨)이라는 시풍을 주도하였다. 조조의 아들 조식이 특히 시에 뛰어나, 일곱 걸음만에 시를 지었다는 '칠보시(七步詩)'는 널리 후세의 사랑을 받았다.
시심이 두터운 조조이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는 더없이 비정한 정치가였다. 한마디로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었다. 조조는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를 옹립하여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소위 협권(挾權) 정치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조조의 인재에 대한 갈망과 애정은 특별하였다. 참모인 곽가를 발탁하고는 "나의 대업을 성취시킬 이는 그대 말고는 없다"고 극찬하였고, 순욱을 '나의 장량'으로 애지중지하였다. 210년 유명한 구현령(求賢令)을 발표하여 "천하에 묻혀 있는 인재를 찾아내라. 오직 능력만으로 천거해라. 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할 것이다"고 천명하였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 말처럼 불념구악(不念舊惡) 즉 지난날의 원한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수도 용서했고 조조 집안 3대를 능멸한 진림도 그 재능을 가상히 여겨 참모로 발탁하였다. 특히 격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구하였다. 조인, 조홍처럼 친인척도 능력 있는 자는 중용하였으며, 귀순자나 신분이 비천한 자도 과감히 발탁했다.
반면에 조조는 극단적 이중성을 갖고 있어 '잔인'하고 '의심'이 많고 '자신을 무시'한 자는 결코 용서치 않았다. "내가 남을 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버리게 하지 말라"는 말처럼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순종치 않는 자는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순욱을 재상인 상서령으로 중용하고 그의 아들을 사위로 삼았지만 자신의 통치방식에 반대하자 자살케 하였다. 진수는 조조는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 기(忌)가 심한 사람이라 평하였다. 환관의 후손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명문귀족이나 말 잘하는 변설가 등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특히 심했다.
후대에 조조는 늘 호훼포폄의 대상이 되었다. 명 말 청초의 명신 왕부지는 조조의 지략과 지능을 높이 샀다. 반면 청의 건륭제는 조조를 '찬역자'로 규정하였다. 청의 역사가 조익도 권모술수로 사람을 다스렸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하지만 마오 시대의 석학 궈머루는 조조를 혁명가로 재평가하였다. 루쉰의 말처럼 '적어도 영웅'인 조조의 치적은 우리에게 사람에 대한 세평은 늘 변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