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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간 젊은이들···파독(派獨)근로자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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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혜민 기자] 가난을 벗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파독(派獨) 근로자들의 이야기가 올해로 50년이 됐다.


파독근로자는 그동안 한국경제와 유럽 한인사회 형성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올해 파독근로자 50년, 한·독 수교 130년을 맞아 서울 양재동에 파독근로자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재조명되고 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69달러로 유엔이 조사한 120개국 중 인도 다음으로 가난한 나라였다. 실업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경제 발전을 위해 외화 유입이 필요했다. 반면 서독은 경제적 호황기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우리나라는 1977년까지 모두 31차례에 걸쳐 8000명에 달하는 젊은이를 독일 광산의 인력으로 보냈다. 비슷한 기간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1만1000여명도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낯선 타국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1970년 간호조무사 자격으로 독일에 건너한 문모씨는 "말이 통하지 않아 6개월 동안 밤마다 눈물로 지내야 했다"고 당시를 회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눈물과 땀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1965년부터 10년 간 송금한 외화는 총 1억153만 달러로 당시 총 수출액 대비 1.6~1.9%에 달했다.


이들은 유럽 한인사회를 구축하는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현재 독일 한인은 3만5000명 수준으로 이들 중 상당수가 당시 파견된 근로자와 그들의 가족이다. 파독근로자들은 현재 지역별로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재독한인간호협회, 파독산업전사 세계총연합회 등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독 근로자들은 우리 정부가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독일에서 상업차관을 들여왔다는 '임금 담보설' 등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뭇매를 맞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해외 진출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나 평가가 너무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올해 파독근로자 50년, 한·독 수교 130년을 맞아 설립된 파독근로자 기념관은 큰 의미를 갖는다. 개관 기념식에 참석한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들의 헌신과 노고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큰 디딤돌이 됐고 국제사회에 우리 민족의 근면성과 잠재력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기념관 건립은 파독 근로자의 눈물겨운 역사와 의미를 다음 세대까지 생생히 전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혜민 기자 hme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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