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아,저詩]유종인의 '저수지에 빠진 의자'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8초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의자가/저수지 푸른 물 속에 빠져 있었다//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살얼음 끼는 물 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다리를 부러뜨려서/온몸을 물 속에 던졌던 것이다/물 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의자가 물 속에 든 날부터/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물은 누워서 흐른 게 아니라/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서서 흐르고 있었다//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슬몃 건너편 산을 데려와 앉히기 시작했다//제 울음에 기댈 수 밖에 없는/다리가 부러진 의자에/둥지인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 의자는 무엇인가. 인체(人體) 중의 엉덩이와 허리, 그리고 다리를 의식하며 만들어진 물건이다. 넙적한 바닥을 두어 엉덩이를 받아내고, 사람의 무릎다리 높이만큼 제 다리를 세워 신체를 들어올리고, 넙적 바닥 뒤쪽에는 등을 받아내는 둥근 판이 솟아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걸터앉아 있기 좋도록 스스로를 맞춰온 의자는, 충직한 종노릇을 해왔다. 시인은, 그것이 있을 자리가 아닌 저수지 속에 빠져 있는 다리 부러진 의자를 보면서, 그것의 마음을 헤아린다. 의자는 평생 그를 묶어두었던 다리를 스스로 부러뜨려 여기 물속으로 날아왔다. 늘 사람의 뒷모습만 보아왔던 의자가 문득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명색이 의자인지라, 흐르는 물들이 등을 대고 와서 앉기도 한다. 산도 내려와 거기 앉았다 간다. 평생 사람을 앉힌 의자의 상한 다리 사이로 이젠 물고기들이 쉬러온다. 그런 눈으로 가만히 살피노라면, 저 망가진 의자야말로 스스로를 낮춰 세상을 품는 성자(聖者)가 아닌가.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