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신뢰다. 신뢰는 공동체의 결속을 높여줘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사회적 갈등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교수는 "경제성장이나 물질적 복지로는 인간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으며 공동체 문화와 신뢰 같은 사회적 자본이 긴장을 완화시켜 행복감과 안전감까지 높여준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인수위 시절 "선진국 진입을 위해 대한민국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이 바로 사회적 자본을 쌓는 것이며 사회적 자본은 한마디로 신뢰사회"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뢰 현실은 바닥권이다. 사회학계의 국제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던 '세계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10명 중 3명만이 다른 사람을 신뢰한다고 한다. 이는 미국(4명) 같은 다민족 국가는 물론, 베트남(6명) 같은 개도국보다 낮은 수준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2006년 조사에 따르면 주요 정부기관들에 대한 신뢰도가 낯선 타인에 대한 신뢰도보다 낮았다.
이렇게 사회적 신뢰지수가 낮은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과학자들의 과학기술적 판단에 대한 신뢰도 깊지 못하다.
김유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갈등의 원인이 된 사안 자체는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과학적 판단에 대한 신뢰는 과학적 진리에 있기보다는 사회심리적 현상이나 의사소통 방식의 적절성, 그리고 의사결정 방법의 타당성 등에 더 좌우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공공갈등 중 하나인 원자력기술의 안전성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위한 마중물도 신뢰와 소통이 돼야 한다. 마중물은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넣은 한 바가지의 물로, 선순환 고리를 만들기 위한 출발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원자력 안전 규제의 신뢰성 제고를 위한 마중물은 또 무엇이 돼야 할 것인가? 첫째, 안전문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지식, 기술, 경험 등과 함께 업무태도와 스타일까지 포함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성이다. 둘째, 투명한 규제정보 공개와 정서적인 요소들이 부가된 '공감할 수 있는 안전'에 바탕을 둔 국민 소통이다. 셋째, 과학기술자의 양심과 사회적 정의를 존중하고 실천하는 윤리성이다.
진화론에서 거론되는 '붉은 여왕 가설'에 의하면 주변 자연환경이나 경쟁 대상이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때문에 어떤 생물이 진화를 하게 되더라도 상대적으로 적자생존에 뒤처지게 된다고 한다. 이 가설에 의하면 지난해 원자력에 대한 부정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불거진 이유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정도와 속도가 사회의 정의와 가치의 척도에 못 미쳤기 때문이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도 있다. 원자력 안전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설계오류, 인적오류, 자연재해, 안전문화, 조직문화 등에 이르는 다중의 방호벽을 구축했다. 그렇지만 예측된 것들을 방어하는 노력만으로는 불가지의 영역인 안전을 완전하게 확보할 수 없다. 지금이 최선이라며 자칫 심리적 무장해제를 하는 순간 더 나은 안전을 구축하려는 진화의 노력은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 원자력 기술 관련 기관들은 "또 다른 문제는 없겠는가?"라는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며 진화하기 위해 모든 위험요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대비하고 있다. 그리하여 국민의 행복감과 안전감까지 높여주는 신뢰받는 원자력 안전 규제를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신뢰는 전염되고 퍼지는 것'이라는 박 대통령의 말과 같이 우리나라를 신뢰사회로 만들어가는 소중한 마중물의 한 분야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박윤원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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