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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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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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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희 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별은 사라졌어. 누구나 꿈꾸었던 별 말이야. 세상은 변한다. 역사는 진화하며, 발전한다는 꿈 말이야. 지금 세계의 젊은이들은 그 누구도 그런 별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어. 혁명이란 말 대신 이제 그들은 펩시나 코카콜라를 빨며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월드컵 경기를 보며, 작은 축구공 하나에 열광을 하지. 지구가 들썩거릴 정도로 말이야. 붉은 악마...? 후후. 그게 어쨌다는 거야? 굶주린 가난뱅이들이 넘치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 광란의 정체는 무엇일까?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건 그냥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환상, 집단 최면의 광기에 지나지 않아. 잔디에서 뛰는 수억 달러짜리 몸값의 선수에게 환호하는 그들이 황제가 베풀어놓은 글래디에이터의 피의 제전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야만적인 로마인들과 무엇이 다를까? 이제 인류는 미래가 없어. 아무도 미래를 말하지 않아. 꿈이 없는 세상, 혁명이 없는 세상은 공허할 뿐이야.”

80년대 학번인 그도 이제 마흔 줄의 아저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보니 그와 헤어진 지도 십여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떠나 마다가스카르인가에서 현지 여자를 만나 국수집을 하고 있다는 그는 하림더러 꼭 한번 그곳으로 놀러오라며 이메일을 보냈었다. 이메일에는 이마가 제법 휑해진 동희 형이 인도 계열의 눈이 크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그의 아내와 딸 아이와 함께 활짝 웃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보였다.


어쩌면 동희 형이야말로 일찌감치 세동철학자 똥철이 말했던 망명정부를 직접 실천해보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명과 도피는 종이 한 장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자 눈 내리던 날, 동묘에서 윤여사와 같이 만났던 제주 흑돼지집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날의 주제가 망명정부였다.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튀기며 떠들어대던 동철의 우스꽝스럽던 모습도 떠올랐다.
내 마음의 망명정부.....

후훗. 하림은 혼자 소리없이 웃었다. 하지만 동희 형 역시 그들 80년대 세대의 상처로부터 결코 벗어나진 못할 것이었다. 김세진과 이재호 열사.... 열사라 불리우던 그들의 죽음. 그 역시 그 옛 친구들의 기억으로부터 결코 풀려나지 못할 것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막고, 대학을 병영화하기 위해 전두환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에게 모두 전방입소 교육을 명령하였고, 대학생들은 이를 거부하는 투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1986년 4월, 신림사거리. 밀려드는 경찰의 폭력 앞에서 마침내 김세진과 이재호는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고 3층 옥상에서 떨어졌다. 그 현장에 동희 형도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죽음과 함께 나의 생애도 끝났다.”
가끔 동희 형은 생각난 듯이 말하고는 했다. 그리고 술에 취하면 낮고 느린 목소리로 슬픈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 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 가소서,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둠을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의 길로,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그들이 그날, 그 꿈꾸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몸을 태워 그토록 간절하게 염원했던 새날, 해방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세상이 과연 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름다운 청춘을 바쳐 사랑했던 그 꿈이 헛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림은 천장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생각에 젖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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