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지역은 서울에서 아주 멉니다. 특히 제가 머무는 보스턴처럼 항공기 직항노선이 없는 곳은 거의 하루종일 걸려야 닿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작년에 일본항공(JAL)이 새로 개설한 도쿄에서 보스턴까지의 저렴한 직항 노선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환승하는 귀찮음이 없는 데다 보잉의 최신형 항공기인 787 드림라이너를 탈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그 노선을 예약한 사람들이 일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항공편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잉787 항공기는 작년 12월부터 세계 곳곳에서 전기계통의 고장이나 화재로 불시착하는 사고가 났고, 마침내 얼마 전 보스턴 공항에서도 화재를 일으켰습니다. 관련당국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항공사들은 787의 운항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건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잉 항공기가 문제를 일으켰는데, 피해는 고스란히 일본 항공사들이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항공기가 시장에 첫 선을 보일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최초 구매자를 찾는 일입니다. 항공사들은 안전에 무척 민감하기 때문에 아직 검증되지 않은 항공기를 도입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지요. 보잉787의 경우 첫 번째 구매자는 전일본공수(ANA)로 무려 50대의 확정주문을 통해 787의 출시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일본항공(JAL)이 동참했습니다. 현재 이른바 메이저 항공사 가운데에서는 오직 ANA와 JAL, 그리고 미국의 유나이티드 항공만이 이 기종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일본 항공사들이 이런 '용감한'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일본 항공사들이 일본 정부, 그리고 일본의 산업계와 함께 맺어온 암묵적인 합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항공사들은 보잉의 경쟁사인 에어버스의 항공기를 거의 구매하지 않습니다. 대신 보잉의 항공기 개발과 생산 전 분야에 깊숙이 개입해 왔습니다. 이런 산업구조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지원정책과 맞물리면서, 보잉 항공기를 뜯어보면 일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확고해졌습니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부품들 역시 일본 중소기업들이 제작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구조는 일본 항공사들에는 상당한 부담입니다. 항공기 구매시의 협상력이 약해지고, 또 기종의 다양성을 통해 위험을 분산할 수 없게 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경제성 때문입니다. 787은 금속소재 대신 복합소재를 사용하고, 유압장치 대신 모터구동장치를 채택하는 등, 항공기를 가볍게 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항공기 입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리튬이온 배터리도 이런 노력의 일부이지요. 항공기가 가벼워지면서 연료소모가 크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기술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소지도 함께 존재합니다. 일본 항공사들은 보잉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생긴 경제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아직 덜 검증된 보잉 항공기를 서둘러 구매할 수밖에 없는 기묘한 딜레마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기업 간의 협력은 상대방이 가진 자원과 능력을 상호 활용함으로써 시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지만, 어느 한쪽이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하거나 시장에 큰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 커다란 독이 돼 돌아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경영현장에서 언제 협력을 시작하고 중단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보잉의 정비불량으로 520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인명피해를 기록한 1985년의 항공기 추락사고 이후에도 보잉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굳건히 유지했던 일본항공사들의 선택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 발 묶여 날지 못하는 787이 다시금 묻고 있습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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