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억보다 백석 詩한줄이 낫다던, 기생 자야의 향기 어린 절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나린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니 그가 오지 않을 리 없다"
"이깐 세상을 더러워 내가 버리는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중에서)
사랑 얘기는 언제나 귀를 솔깃하게 한다. 소설가 박완서는 "어떤 사랑 얘기도 귀를 번쩍 뜨이게 하지만 그것이 추문일수록 더 가슴이 뛰게 한다"고 말한다. 가슴 뛰는 사랑을 느끼고 싶다면 한번쯤 삼각산 길상사에 가볼 만하다.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을 저승에서 맺고자 염원했던 지고지순한 사랑 얘기가 잠시 가슴을 적셔 준다. 사랑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간절한지 사찰 곳곳에 그 흔적이 깊게 배어 있다.
'삼각산 길상사'는 사찰이라기보다는 왕족의 별장이거나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의 종택에 가깝다. 간판, 색상 등 외관을 약간 손 본다면 그저 잘 가꿔진 한옥마을로 바뀔 법하다. 건물이 계곡, 산비탈 등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 돼 있는게 특이하다.
누구라도 길상사에 가보면 맨 처음부터 사찰로 지어지지는 않았다는 걸 금새 알 수 있다. 길상사는 97년 개사하기 전까지 삼청각과 더불어 60, 70년대 요정문화를 대표하던 '대원각'이었다. 일주문은 요정에서 사찰로 바꾸는 과정에서 철근콘크리트로 개조했다. 일주문은 속세에서 부처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경계인 일주문을 지나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는 금강문, 금강문이 없는 경우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인 천왕문, 본당에 들어서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을 통해 대웅전 등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길상사에는 문이 일주문 뿐이다. 그렇게 불국토에 들어서 제일 먼저 수호목인 우람한 느티나무를 만나게 된다.일반 사찰의 금강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인 셈이다. 근육질의 금강역사는 '금강저'라는 뭉둥이를 들고 우악스런 표정으로 부처를 수호한다. 느티나무가 그 역할을 한다.
느티나무를 지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당초 대원각 시절엔 없던 건물이다. 사찰에서 '전(殿)'이란 부처를 모시는 곳이다. 길상사의 설법전은 건물 형태로는 강당처럼 보인다. 묘하게도 설법전 앞에는 성모마리아를 연상시키는 석상이 서 있다. 관세음보살상이다. 마리아를 닮은 보살상이라니. 석상은 지나치게 간결할 정도로 현대적이며 모딜리아니의 여인상처럼 길쭉하다. 또한 서양 여인의 인상을 지녀 우리가 흔히 봤던 관음상과는 영 딴판이다.
본래 천주교 신자였던 조각가의 작품이다. 천주교 신자의 시각에서 만들어 그런 형상이 나왔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헌데 이런 석상을 수용한 길상사도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개사식 당시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이 나란히 축사를 했다고 하니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설법전 다음에 이르는 곳이 길상사의 중심인 극락전이다. 길상사는 대웅전 대신 극락전을 두고 있다. 극락전의 주불은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 양옆에는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이 놓여 있다.
여기엔 길상사의 원 주인이었던 여인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아미타불은 서방 정토인 극락세계에 머물며 불법을 펴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다. 살아서 사랑을 다 이루지 못한 여인은 아미타불의 힘을 빌어 모든 한을 내려놓고 서방정토에 이르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에서 아미타불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그 여인이 바로 김영한(1916∼1999)이다. 그녀는 열 다섯살에 결혼했으나 남편이 우물이 빠져 죽어 청상이 됐다. 갈 곳이 없는 영한은 권번 기생으로 나섰다. 영한은 계란형의 미인으로 가무는 물론 시서화가 뛰어나 곧 최고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연히 조선의 많은 지식인이 그녀를 연모했다. 스무살 되던 해 그녀는 뛰어난 재주를 아까워하던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지원하던 사람 중의 한명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자 2년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함흥으로 돌아왔다. 은인을 옥바라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였던 백석시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둘은 만난 지 하룻만에 동거를 시작해 석달간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에 백석의 아버지는 아들을 영한으로부터 떼놓고는 다른 여자와 강제 혼인을 시켰다. 백석은 혼인날 밤 도망쳐 먼저 서울로 와 있는 영한과 다시 만나 한동안 동거했다. 그러나 영한은 젊은 백석의 앞날을 걱정해 헤어지자고 했고, 그런 영한에게 백석은 러시아로 떠나자고 졸랐다. 이에 영한이 숨어버렸다.
마침내 백석은 혼자 러시아로 떠났고 둘은 영영 생이별해야 했다. 해방된 다음 백석은 북한으로 돌아왔다.그새 영한은 서울에서 요정을 열어 큰 돈을 벌었다. 이후 영한은 대원각을 열어 60, 70년대 막후에서 '요정정치시대'를 펼쳐갔다. 그 대원각이 바로 지금의 길상사다.
영한은 살아 생전 매년 백석의 생일이면 하루동안 곡기를 끊고 방안에 앉아 불경을 외우며 그를 기렸다고 한다. 또한 수억원을 쾌척해 백석문학상을 제정, 문학도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말년에 백석과의 다하지 못한 이승의 사랑을 저승에서 잇고자 소원했다. 87년 영한은 미국에 있던 법정 스님을 찾아 쾌척할 뜻을 비쳤다. 당시 가격으로 1000억원이 넘었다.
그러나 무소유의 삶을 살던 법정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대원각은 법정 스님이 머무는 암자의 본사인 송광사에 희사되었고, 길상사로 개사하기까지 송광사 분원이 되었다. 97년 개사식에서 영한은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 줄에 비할 수 있으랴"고 고백함으로써 세기의 로맨스가 마침내 세상 사람 모두에게 전해진다. 길상사라는 이름은 개사식 때 미국에서 돌아온 법정이 영한에게 선물한 '길상화 보살'이라는 법명에서 유래한다.
극락전에서 요사채로 오르는 길 옆의 계곡가, 도량의 왼쪽 아래편에 작은 한옥은 영한이 말년에 기거하던 곳이다. 그저 방과 부엌으로 이뤄진 원룸형이다. 공간도 10여평 이내로 작고 아담하다. 정남향이다. 따라서 계곡을 측면에 끼고 있다. 이 집이 동향을 취하고 있다면 계곡은 물론 7000여평의 대지와 본채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다. 동향일 때 운치가 더할 듯하다.
그런데도 왜 영한은 자신이 기거할 집을 본채를 외면하고 맑은 계곡을 굳이 회피하도록 지었을까? 백석 때문이었을까? 영한은 죽는 날까지 그곳에 머물다 유언대로 화장돼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다. 유한한 사랑을 영원의 세계로 이끈 한 여인의 염원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제 2편에서 계속>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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