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방자치단체의 하위직 공무원이 국민 세금을 수십억원이나 빼돌린 일을 두고 하는 얘기다. 거액의 공금 횡령도 그렇지만 부정이 수년에 걸쳐 이뤄졌는데도 누구 하나 몰랐다는 데엔 말문이 막힌다. 윤리의식 결여, 허술한 회계 관리, 구멍 난 감사 시스템 등 공직사회의 총체적 부조리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전남 여수시 회계과 8급 공무원 김모씨가 어제 특가법상 국고손실 혐의로 구속됐다. 김씨는 2009년 7월부터 상품권 회수와 급여 지급 및 소득세ㆍ주민세 납부 과정에서 서류를 위조하는 등의 수법으로 76억원의 공금을 빼돌렸다. 수법이 교묘하다손 쳐도 3년 동안이나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시와 전남도는 10여차례 감사를 하고도 밝혀내지 못했다.
시의 허술한 회계 관리 시스템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 전국 공통의 재정관리시스템 'e-호조'가 있음에도 "수기가 더 빠르고 정확하다"는 김씨 말만 듣고 지출부문의 수기 방식을 허용했다. 상급자는 지급명세서를 확인하지 않고 총액만 보고 결재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10여차례의 감사에서도 김씨의 부정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건 지자체 감사 시스템에 큰 구멍이 뚫렸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러니 다른 곳은 온전할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경북 예천군의 한 직원이 허위 공유재산 매각 등으로 46억3000만원을 횡령한 사실이 어제 드러났다. 전남 완도군, 제주시 등 지자체뿐 아니라 통일부, 행정안전부 소청심사위에서도 직원의 공금 횡령 사실이 잇따라 적발됐다. 공직사회에 세금 도둑이 활개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국 지자체는 물론 각급 행정기관에서도 지금 세금이 새나가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구멍이 크게 나 있는 회계 관리 및 감사 시스템을 전면 뜯어 고쳐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공금을 빼돌리는 세도가 있을지 모른다. 시스템에 허점이 있으면 뿌리를 못 뽑는다. 차제에 소속 공무원의 비리가 드러나면 개인의 범죄에 초점을 맞춰 봉합하려는 공직사회의 잘못된 관행을 고쳐 부서 또는 기관 전체에 연대 책임을 지우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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