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실리콘 밸리에선 제조업 생산기지 귀환운동이 시작됐다. 미국 브랜드의 컴퓨터나 휴대전화가 중국 현지에서 생산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지만 중국의 인건비가 치솟자 미국의 지방 앨라배마 주 같은 곳에서 생산하는 것이 그다지 불리하지는 않게 됐다. 구글이 무선 미디어 플레이어를 제작하면서 그 제품에 '미국에서 설계 및 생산'이라는 문구를 넣은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다. 항공분야의 에어버스사가 역시 앨라배마 주에 생산공장을 세운다고 발표한 최근 소식도 있다. 미국이 수십년 동안 소형가전 위주로 중국에 외주 생산을 맡겼지만 중대형 컴퓨터 분야에서는 외주를 준 적이 없다. 슈퍼컴퓨터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기밀 유출 가능성 때문이다. 슈퍼컴이 핵무기급의 국부로서 취급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다.
연중 이맘때면 세계 500대 슈퍼컴 순위가 발표되곤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소재한 컴퓨터가 세계 20위라고 하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순위는 슈퍼컴 완제품을 제작해내는 능력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라도 사서 자신의 소유로 했으면 매입 기관의 슈퍼컴으로 간주한다. 결국 국가별 슈퍼컴 구매능력을 보여주는 순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순수 제작능력은 미국이 독점적으로 갖고 있다. 일본이 미국 다음이고 그 다음은 놀랍게도 중국이다. 중국은 아직은 미국 실력의 10%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중국이 자체 제작한 계산장치 칩이 들어간 슈퍼컴이라는 점만 갖고도 세계 3위의 실력을 갖고 있음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중국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중요한 것은 초당 1000조번 이상의 계산을 해내려면 하드웨어 각 파트의 성능도 좋아야 하지만 각 파트를 대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주곡처럼 지휘해내는 지휘자의 역할이다. 지휘자란 컴퓨터 메모리에 내장된 운영체계(OS)다. 소프트웨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엔진 급인 핵심 소프트웨어다. 슈퍼컴의 성능은 개인컴퓨터(PC)의 수천, 수만배가 될 정도로 높지만 슈퍼컴용 OS와 PC용 OS는 기본 골격 면에서 구조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PC급 OS의 운신의 폭이 커서 위로는 슈퍼컴퓨터 OS로 변모할 수도 있고 아래로는 스마트 모바일 단말기 OS로도 변신할 수 있다. 이런 OS를 보유한 기업은 IBM, 마이크로소프트, 애플뿐이다. 특유의 일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그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기업 역시 미국 기업뿐이다. 오라클, 구글, 페이스북 이외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아직 없다.
향후 인류 발전의 하부구조는 슈퍼컴이 좌우할 것이 분명하다. 환경, 국방, 식량, 식수, 기상, 장수 해법들과 같은 거대 데이터급 문제를 풀어낼 방도는 슈퍼컴을 활용하는 길 밖에는 없다. 힉스 입자 존재 유무 판단도 슈퍼컴이 아니고서는 전혀 할 길이 없다. 슈퍼컴 세계에서도 여타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존재하는 80-20 규칙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드웨어는 20퍼센트뿐이고 나머지 80퍼센트는 소프트웨어라는 점이 IT계 불변의 진실이다.
문제는 소프트 파워다. "바보야, 문제는 소프트웨어야"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거든 핵심소프트웨어만은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늘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삼성의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애플 측의 판매금지가처분 신청으로 인해 미국에서 곤경에 처한 경우가 발생하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번 특허 판결 사태의 본질이 결국 구글 OS와 애플 OS 간의 대결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 곤란하다. OS를 놓고 구글과 애플이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삼성이 구글의 대리전을 펼치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기업을 넘어서서 국가가 관심을 가져야 할 중차대한 문제다.
문송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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