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중국'이 최강 日을 지우다
-1988년 글로벌 대기업 순위 8개 日기업
-소니등 전자제품·도요타 등 車 강세
-1990년대 중반부터 日경기 거품 꺼져
-2000년대 들어와 中기업들 위력 떨쳐
[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한국 기업의 지도가 끊임없이 바뀌었던 것처럼 상위 글로벌 기업의 지도도 크게 변화했다. 특히 지난 25년 동안 일본기업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글로벌 기업의 지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한국경제와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100대 기업에 이름을 올렸고 현대차, 포스코, LG전자 등도 지난 25년 동안 순위가 가파르게 상승했지만 변화를 선도하지 못하면 언제든 뒤처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포브스, 포천 등에 따르면 주식시장 시가총액 기준으로 지난 1988년 글로벌 대기업 10위에 포함된 일본기업의 수는 전체의 8개에 달했다. 미국기업으로는 IBM과 엑손모빌만 이름을 올렸다.
글로벌 시가총액 순위는 NTT, IBM, 스미모토은행, 엑손모빌, 다이이치간교은행, 후지은행, 도쿄전력 순이었다. 미국의 경제를 이끌었던 제너럴일렉트릭(GE), AT&T, 포드, GM, 듀퐁 등 미국기업은 모두 10위권 밖이었다.
시가총액 순위를 50개까지 확대하면 일본기업의 수는 전체의 66%에 달할 정도로 위상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일본 주식시장에 버블이 형성됐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금융회사는 물론 일본 통신 전문업체 NTT, 도요타자동차 등 제조업체의 위상은 미국의 기업을 압도했다.
이 같은 일본기업의 위세는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고가 전자제품 시장은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기업들로 넘쳐났다. 품질을 앞세운 혼다, 도요타 등 자동차 역시 전통의 유럽차들을 밀어내고 세계 각지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한국에서도 고가 일본의 전자제품과 자동차는 부유한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아시아 금융위기와 글로벌 지각변동=1990년대 중후반 일본 경제에 버블이 꺼지기 시작했다. 제조업 왕국 일본의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몰려들었던 글로벌 자본도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일본이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진원지는 아니었지만 이후 성장률은 눈에 띄게 둔화됐다. 매년 40조엔이 넘는 부실채권이 새롭게 양산됐고 시간이 갈수록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일본식 계획경제체제 속에 머물던 일본 기업들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선도하기보다는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에 빠져 있었다. 일본 기업 특유의 기업문화도 몰락의 원인 중 하나다. 기존 기술과 관련한 대규모 투자에만 집중해 신기술을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데 실패했고 소위 '장인정신'에 대한 고집이 성장의 한계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일본의 기업들이 뒷걸음질 치는 동안 한국과 중국 기업의 성장 속도는 상대적으로 빨랐다. 강제적인 구조조정을 거쳐 조직의 효율성을 높인 한국 기업들은 혁신을 거듭하면서 휴대폰, TV 시장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미국기업 역시 '아이폰'을 앞세운 애플의 부활과 구글,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범정보기술(IT)산업의 성장을 통해 저성장 기조 속에서 한줄기 희망을 찾았다. 미국 제조기업이 혁신을 통해 본래의 가치를 찾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2년 오늘=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10년 만인 2008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기업 간 지각변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동안 글로벌 기업들의 시가총액도 크게 변동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상위 10대 기업으로 이름을 올린 기업은 애플, 엑손 모빌, 중국석유, 마이크로소프트, 중국 공상은행, 월마트, IBM, 차이나모바일, AT&T, 버크셔 해서웨이 순이다. 25년 전만 해도 시가총액 상위 기업의 3분의 2 이상이 일본기업이었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최근에는 중국자본이 일본기업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외신보도도 있었다. 일본기업들이 부진한 실적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엔고 현상마저 겹쳐 자본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혁신을 거듭한 IT기업의 순위가 가장 눈에 띈다. '아이폰', '아이패드'를 앞세운 애플은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시가총액 30위권에서 1위로 뛰어올랐고 구글은 10위권, IBM은 8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인수·합병(M&A)과 풍부한 소비시장 등을 토대로 급성장한 중국기업 3곳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시가총액 기준을 20위까지 늘리면 중국기업의 숫자는 8개에 달한다. '주식회사 중국'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다.
한국 대표기업 삼성전자는 글로벌 시가총액 순위 23위에 오르기도 했다. 현대차와 기아차 역시 글로벌 자동차 업계 중 시가총액 2위에 오르는 등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도요타, 소니 등 일본 대표기업들은 당분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어려워 보인다. 도요타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10위권대 진입을 노리기도 했으나 4년 만에 3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소니 역시 200위권에서 400위권으로 추락했다.
◆'+25년' 글로벌 기업의 미래=지난 25년 동안 '영원한 승자'는 없었다. 앞으로 25년 역시 크고 작은 위기와 기회가 반복되며 새롭게 주목받는 기업이 출현하는가 하면 저물어 가는 기업도 있을 것이다.
자만심으로 변화를 외면하는 순간 일본 기업이 겪고 있는 위기는 모든 기업에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휴대전화, TV 시장을 제패한 한국기업의 위상, 혁신을 통해 글로벌 시가총액 1위에 올라 있는 애플의 기세는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앞으로 25년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의 기업들이 글로벌 시가총액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삼성, 현대차, LG가 일본과 미국의 기업을 열심히 쫓아왔던 것처럼.
최근 삼성그룹이 컨트롤 타워를 교체한 것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적절했다는 평가가 많다. “한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리지만 명성과 위세는 단 6개월 만에 무너질 수 있다”는 노(老)회장의 한마디는 과거에도 앞으로도 유효한 이야기다.
임철영 기자 cy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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