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전필수 기자]울산 바닷가 허허벌판 사진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정주영 신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맨땅에 헤딩하듯 세워진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대의 조선사가 됐다. 시가총액은 무려 40조원을 오르내린다.
또 다른 그의 유산인 현대자동차는 세계적 자동차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국내시장은 80% 이상을 장악했고,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일본 차들과 한판 승부를 할 정도로 컸다. 시총은 50조원을 넘는다. 얼마 전에는 현대왕국의 모태였던 현대건설 인수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현대그룹과 한판 승부도 벌였다. 그 덕에 당초 3조원대로 추정되던 매각대금이 5조원을 훌쩍 넘겼다. 당시 현대차그룹측은 신성장동력 확보차원에서 인수라고 했지만 시장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엎치락 뒤치락 했던 인수전에서 이길 듯 보인 쪽 주가는 여지없이 급락했고, 지는 듯 보인 그룹 계열사 주가는 급등했다.
정주영 회장의 사후, 현대건설과 함께 분리매각됐던 하이닉스가 매물로 나왔다. 시장의 관심은 자연스레 범 현대가를 향한다. 현대차와 함께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현대중공업이 이번엔 나설 태세다. 시장에서 하이닉스 인수설이 불거지자 현대중공업은 "현재까지 확정된 사항은 없다"며 참여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은 그간 현대상사와 현대오일뱅크를 인수, 옛 현대그룹 계열사들을 사들인 전력이 있다. 자금도 충분하다. 1분기말 기준 현대중공업의 현금은 2조8149억원이다. 계열사인 현대미포조선도 5000억원이 넘는 현금을 보유 중이다. 하이닉스 인수금액은 약 2조5000억원에서 3조원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싸늘하다. 현대중공업의 하이닉스 인수설이 불거질때마다 현대중공업 주가는 급락했다. 4월4일 시장에 루머가 돌면서 3% 급락하더니 5월 초에는 3일 연속 4% 내외의 급락세를 보였다. 지난 8일에도 5.57%나 급락하며 지수를 끌어내렸다.
현대중공업이 조선과 해양 플랜트 외에도 신재생에너지 등으로 사업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지만 반도체와 연관성은 아무래도 떨어진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반도체 업황이 조선업황보다 변동성이 더 큰 것도 부담이다.
자식이 부모가 남긴 유산을 되찾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대한민국 경제사에 획을 그은 훌륭한 아버지의 유산이고, 값어치도 있는 유산이다.(하이닉스는 세계 2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다.) 다소 경제성을 희생해서라도 찾고 싶은게 아들의 마음일 수 있다.
문제는 장한 아들들의 결정이 다른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의 지분율은 10.80%다. 계열사와 특수관계인 지분을 모두 합쳐도 21.31%다. 나머지 78%가 넘는 일반 주주들에게도 하이닉스가 되찾아야 할 아버지의 유산은 아니다.
전필수 기자 phil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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