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태진 기자]금융당국이 바짝 엎드려 있다. 나중에 문제될 수 있는 정책에 대해서는 결정을 최대한 미루는,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이 공무원 신분인 금융위원회에 그치지 않고, 금융감독원에도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저축은행 감독처럼 일만 많고 이런저런 오해 살 가능성이 높은 부서는 기피 0순위가 된 지 오래다. 어떻게든 빨리 다른 부서로 옮겼으면 하는 마음 뿐으로 보인다. 금감원 조사역의 잇단 비리에 이어 김종창 전 금융감독원장, 김광수 금융정보분석원장, 김장호 금감원 부원장보 등 수뇌부에까지 저축은행의 '검은 돈' 망령이 번지면서 금감원 직원들은 아예 입을 닫았다.
어떻게든 논란의 핵심에서 비껴가는 게 상책이란 정서 탓이다. 일은 많아졌다. 검찰의 저축은행 비리 수사와는 무관하게 구조조정 업무는 진행해야 하기에 저축은행 관련 부서는 연일 야근과 주말 특근이다. 그러나 업무 집중력은 눈에 띄게 약화됐다. 업계와 결탁하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혀 선의의 조사역들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금감원 복도에서 만나는 저축은행 조사역들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 실태조사에 나서는 것조차 부담스럽다"고 토로한다. 오는 9일까지 259개 사업장에 대한 서면조사, 173개 사업장에 대한 현장조사를 마치기 위해 매일 야근이다. 그러나 업무 결과에 대한 평가가 두렵다. "왜 그런 사업장을 정상화 가능한 곳으로 판정한 것이냐", "저축은행 BIS 비율을 높여주기 위해 봐주기식 조사에 나선 것이냐"는 식의 편견과 오해에 찬 말을 들을까 걱정이다.
업계도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정치권과 검찰이 저축은행 소용돌이에 빨려들면서 금융지주사를 품에 안아 영역을 확장하려는 지주사들의 계획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장 이달 안에 일반 지주사가 금융 자회사 지분을 갖도록 근거를 마련해주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해당 대기업들은 거액의 과징금을 내야하는 처지다. 또 공적자금 투입 금융지주사 인수때 의무 매입 지분율을 낮춰주는 내용의 금융지주회사법 시행령 개정안도 표류할 경우 우리금융 매각도 올스톱 될 수 있다.
최근 정부는 금감원 직원이 다른 직장으로 옮길 경우 취업심사를 받도록 한 대상을 종전 2급 이상에서 4급 이상으로 확대하는 전관예우 근절방안을 발표했다. 전 직원의 77%가 여기에 해당된다. 금감원에 입사해 5년만 근무해도 이직은 힘들어졌다. 금감원에 뼈를 묻어야할 판이다. 직업 선택의 자유마저 빼앗겼다는 푸념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일에 대한 자긍심은 무너진지 오래고, 근무여건 악화에, 이직의 통제까지 '금감원 때리기'가 계속되면서 금융감독 기능 위축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터널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려면 언젠가 이 곳을 빠져나와 다시 빛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질책과 다독임의 미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조태진 기자 tjjo@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