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한국 관객들이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 개봉관을 찾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다. ‘아마존의 눈물’ ‘북극의 눈물’ 등 내셔널 지오그래픽 스타일의 자연 다큐멘터리와 ‘울지마 톤즈’ ‘바보야’ 등 셀러브리티들의 일대기를 그린 휴먼 다큐멘터리들이 개봉 당시 큰 인기를 누리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는 평론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개봉관에서 죽을 쒔다. 주로 부조리한 사회의 스펙트럼에 메스를 들이대는,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진지한 다큐멘터리가 그랬다. 살기 힘든 한국 사회의 ‘팍팍’한 현실을 반영하는 결과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이나마 현실에서 나와 꿈과 모험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은 극장에서까지 무거운 현실과 직면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번 주 개봉된 ‘종로의 기적’은 강한 메시지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게다가 영화의 감독을 포함해 네 명의 출연 배우 모두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표한, 이른바 ‘커밍 아웃 Coming Out’을 한 동성애자다.(종로구 낙원동은 국내 동성애자들이 모여드는 성지 격인 동네다) 장사 안 되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다. 주말 안방 극장 TV 드라마에서 동성 커플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가 다뤄질 정도로 의식이 변화했다곤 해도,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각은 여전히 굳건하다.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조각 같은 마스크와 몸의 ‘꽃미남’ 혹은 섹스에만 집착하는 여성적인 ‘변태’ 이렇게 두 부류 정도일까. 이혁상 감독은 연출 데뷔작인 ‘종로의 기적’을 통해 이런 시각들이 철저히 무지와 무관심, 더 나아가 혐오에서 비롯된 심각한 오류였음을 이야기한다.
일단 주인공들의 면면이 무척 ‘예사롭다’. 독립영화감독 소준문, 인권활동가 장병권, 스파게티 요리사 최영수 그리고 대기업에 근무하는 정욜 등 네 명의 동성애자가 영화 속 주인공이다. 직업도 평범한 데, 외모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주얼이다. ‘종로의 기적’은 감독의 시선과 내레이션으로 이 네 남자의 사랑과 일, 그리고 인생을 담담하게 좇는다. 유쾌하기도 하지만 울컥하기도 한다. 이들은 남들과는 다른 성 정체성 때문에 일반의 차가운 시선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지만, 이 네 가지 삶들은 (다소 불편하기는 해도) 경쾌하고 즐겁다. 실험성이 강한 요즘 다큐멘터리의 트렌드와는 달리 ‘종로의 기적’은 다분히 낡게 느껴질 만큼 ‘스트레이트’하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네 주인공들의 삶이 더 쉽고 친숙하게 피부에 달라붙는다. 영리한 선택이다.
이혁상 감독은 ‘종로의 기적’을 통해 음지에 숨어 살던 동성애자들이 낙원동 ‘게이 거리’로 당당하게 나올 용기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는 연출의 변을 밝힌 바 있다. 더 나아가 일반 대중은 물론 호모포비아(동성애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자)의 공고한 신념조차 아주 살짝 흔들리게 할 수 있다면, 이 영화는 모든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100%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태상준 기자 birdc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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