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귀를 의심했다. 국내 수입사가 제멋대로 붙인 것이 뻔한 ‘디어 미’ 라는 제목의 프랑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소피 마르소가 주연으로 출연한다고 한다. 소피 마르소. 광고 음악으로 익숙한 주제곡 ‘리얼리티 Reality’의 영화 ‘라 붐’(1980)’으로 스타덤에 오른 여배우다. 이후 폴란드의 예술 영화 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와 결혼하며 연기파 배우로의 변신을 꾀한 소피 마르소는 1990년대 이후 ‘007 언리미티드’의 눈요기 본드걸이나 끔찍한 실패작 ‘안소니 짐머’ 류의 범작들에 출연하며 잊혀졌다. 몇 년 전 칸 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에서의 가슴 노출 사건으로 옐로우 저널리즘의 우스갯감으로 전락하기도 할 정도로, 소피 마르소는 더 이상 배우가 아닌, 퇴락한 셀러브리티일 뿐이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디어 미’의 감독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얀 사뮤엘. ‘엽기적인 그녀’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마이 쌔시 걸’로 망신당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탈 운명의 마리옹 코티아르(‘라비앙 로즈’)를 발굴한 ‘러브 미 이프 유 대어’로 마법 같은 사랑 이야기를 깔끔하게 그린 감독이다. 얀 사뮤엘 감독이 프랑스로 다시 돌아와 연출한 ‘디어 미’는 그의 초기 재능이 다시 빛을 발한 수작 소품이다.
‘디어 미’의 주인공 마가렛은 버지니아 울프, 마리아 칼라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을 롤 모델로 삼고 살아가는 40대 커리어 우먼이다.(‘친애하는 나에게’ 라는 뜻의 번역 제목으로 개봉되지만, 영화의 원제는 ‘L’age De Raison’으로 ‘생각할 나이’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부족할 것 없는 완벽한 삶이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던 어린 시절을 굳이 부정하던 그 앞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이는 마가렛이 7살 때 미래의 자신에게 쓴 편지. 고래수의사, 성녀, 우주탐험가, 공주 등 어린 시절에 자신이 꿈꿨던 파란만장한 미래를 읽던 마가렛은 문득 자신의 현재를 돌아본다.
‘디어 미’는 마가렛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생각하고 좀 더 자라난다는 설정의 성장담으로,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소재의 영화다. 감독은 귀여운 애니메이션과 동화 같은 내러티브 전개로 진지함과 심각함의 정도를 살짝 약화시키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소피 마르소의 연기도 좋다.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읽는 마가렛의 모습에선 소피 마르소가 찬란했던 그의 1980년대 황금기를 돌아보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 그를 다시 주목해도 되겠다.
태상준 기자 birdc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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